욥은 이해할 수 없는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믿고 있습니다. 하늘을 날아가는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에도 하나님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을 믿는 것이죠. 따라서 그는 지금 자신의 삶에 일어나는 고통스런 재난에 대해서 왜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을 허락하셨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의 친구 빌닷은 욥이 죄를 지어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욥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 세상에 죄가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욥기 9장 2절에 욥이 다음과 같이 빌닷에게 대답했습니다. “(욥 9:2) 내가 진실로 그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빌닷, 나도 자네 말이 옳다는 것을 안다네. 악인은 반드시 벌을 받고, 죄인은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일세.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죄 없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욥이 3절에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욥 9:3)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사람이 하나님과 이것은 왜 이렇습니까? 저것은 왜 저렇습니까? 하고 논쟁을 하려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아무말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절대주권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그 누가 토를 달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우리의 가방이나 지갑 같은 소유물을 가져가려고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 “지금 무엇 하십니까? 그것은 제 것입니다.”하고 말하며,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건강이나 재물을 가지고 가신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 지금 무엇 하십니까? 그것은 제 것입니다.”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니 주님께서 주실 권한도 있으시고 취해 가실 권한도 있으십니다. 욥은 분명히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자신의 삶에 일어난 재앙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탄식하듯 12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욥 9:12)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누가 물을 수 있으랴” 앞서 욥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라는 믿음의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같은 이유로 욥은 왜 하나님이 자신에게 이러한 엄청난 고난을 주셨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지 못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욥은 억울합니다. 자신이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하나님이 자신을 못살게 괴롭히시는 것처럼 느껴져 억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욥은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처지임을 깨닫고 괴로워합니다. “(욥 9:15)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하였을 뿐이며 (욥 9:16)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 욥은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자기 스스로 죄가 없는 사람이며 의로운 삶을 살려고 최선을 다해온 삶이라 할지라도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억울함에 대해서 털어놓고 싶고, 하나님께 이러한 처사는 부당하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은 쌓이고 쌓여 있지만, 할 수가 없는 것이죠. 욥은 재판장에 출석한 피고의 심정입니다. 그의 친구들이 욥이 죄를 지었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욥은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이 너무나도 억울한 자기의 처지를 변론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이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아무리 말해 본들 하나님께서 자신의 변론이 먹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자신이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지금 아무런 상황도 고난은 심해져만 가고 고통은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자신이 당하고 있는 이 모든 재앙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욥 9:17) 그가 폭풍으로 나를 꺾으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많게 하시며 (욥 9:18) 나로 숨을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으로 내게 채우시는구나” 욥은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마음을 가감없이 표출합니다. 동시에 그는 지금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자신을 이렇게 치시는 것에 대해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자포자기적 심경을 토로했습니다. 17절에 등장하는 ‘폭풍’이란 단어는 욥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고난 앞에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보여줍니다. ‘폭풍으로 나를 꺾으셨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나를 짓누르셨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르고 계신데 이 고통을 어떻게 빠져 나겠습니까? 나약한 욥이 감히 저항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무런 까닭도 없이 자신을 괴롭히고 상처를 입히시고 계시다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힘든지 18절에 숨 쉬기 조차 어렵고 괴로움만 채워져 가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을 매몰차게 괴롭히시는 하나님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욥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며 자신에게 혹독한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고 있습니다. “(욥 9:20)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하리라” 욥은 절대적으로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은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비록 자신이 생각할 때는 아무런 죄가 없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일 수 밖에 없는 이 현실도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비록 나에게 죄가 없다 해도, 나는 나를 꾸짖어야 하고 비록 내가 흠 없다 해도, 나는 나를 죄인이라 인정해야 할 걸세.” 21절 입니다. “(욥 9:21) 나는 순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 그는 자신이 순전한 삶을 살았으나 그러한 삶 조차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보며 자신의 삶을 경멸히 여기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욥의 말들을 통해서 교리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있지만, 삶으로는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 인간의 심리적 갈등을 잘 보고 있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머리로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심을 인정 하겠으나, 마음으로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 다 동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내 삶을 어렵게 하시는지, 왜 하나님이 이렇게 삶 속에 고난을 허락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욥이 지닌 신앙의 한계 였습니다. 물론 그가 당한 고난의 크기를 보았을 때 그가 이렇게 반응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욥기를 통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악을 행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지금 당장 사자굴에 들어가는 것 같고, 풀무불 속에 들어가는 재앙 같은 일들이 일어날지라도 하나님께서 선하신 역사를 이루고 계심을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어 표현 가운데 “인생이 돌을 던지면 그 돌을 가지고 집을 지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난이 발생하면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고난을 통해 성장과 성숙의 기회로 삼으라는 것이겠죠. 쉽지 않는 일입니다만,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병원 심방을 가보면 오랜 투병생활로 죽음 앞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고난 속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와 찬양은 상황과 환경을 뛰어넘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일이 잘 풀리면 하나님을 찬양하다가도, 일이 조금이라도 엉키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떠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하심을 고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