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30 비난받지 아니하려거든 (욥기 6장 14-30절)

중국의 시인 이태백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고난과 불행이 찾아올 때에, 비로소 친구가 친구임을 안다.” 욥에게는 세 명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평상시 이들은 매우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에게 고난과 불행이 찾아오자, 이들은 친구로서 욥에게 위로를 해주기는커녕 도리어 욥을 비난하고 정죄했습니다. 욥기를 읽을 때마다 “이 사람들이 정말 욥의 친구들이 맞는가?”, “원수진 사람들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친구들을 향한 욥의 질타 입니다. 고난에 빠진 친구를 향해, 죄인이라고 단죄하며 어서 회개하라고 다그치던 엘리바스와 나머지 두 친구들을 향해서 욥이 그들의 무정함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욥 6:14) 피곤한 자 곧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를 그 벗이 불쌍히 여길 것이어늘” 욥은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비록 고난 가운데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폐했다 하더라도 자네들은 친구인 나를 적어도 불쌍히 여겨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15절 “(욥 6:15) 나의 형제는 내게 성실치 아니함이 시냇물의 마름 같고 개울의 잦음 같구나” 시냇물은 언제나 일정하지 않습니다. 비가 오면 불어나고, 가뭄철이 되면 말라 버립니다. 욥은 친구들의 우정이 이런 시냇물처럼 변덕스러워 의지하지 못할 대상임을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죠. “자네들의 무정함이 마치 가뭄 철 말라버린 시냇물 같구려!” 개울물은 비가 오면 농사도 지을만큼 물이 넉넉해 보입니다. 그러나 곧 급격하게 사라집니다. 욥은 자신의 친구들의 우정이 그렇다는 거에요. 고난을 당한 욥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할 때는 정작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개울 같은 친구들입니다.
16-17절 “(욥 6:16) 얼음이 녹으면 물이 검어지며 눈이 그 속에 감취었을지라도 (욥 6:17) 따뜻하면 마르고 더우면 그 자리에서 아주 없어지나니” 이것도 앞서 15절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 많아지지만, 더운 여름철에는 물이 말라 아예 흔적도 없어집니다. 18절 “(욥 6:18) 떼를 지은 객들이 시냇가로 다니다가 돌이켜 광야로 가서 죽고” 여기서 “떼를 지은 객”이란 사막을 횡단하는 무리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목이 말라서 시냇가에 물을 찾으러 왔는데, 물이 없는 거에요. 그래서 결국 광야에서 방황하다 목말라 죽음을 맞이 합니다.
19-20절 “(욥 6:19) 데마의 떼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스바의 행인들도 그것을 사모하다가 (욥 6:20) 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을 부끄리고 낙심하느니라” 데마의 떼, 스바의 행인은 앞서 말한 상인들입니다. 실제로 욥 당시에 광야를 건너다가 물을 찾지 못해 죽은 상인들, 객사한 사람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이즘 되면 물 없는 시냇물이 누구를 비유하는지 아시겠죠? 정작 필요할 때는 마실 물도 없는 시냇물의 변덕스러움처럼 욥의 친구들은 욥이 절망에 처하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대상이 되었던 것이죠.
여태까지 비유로만 이야기하던 욥은 이제 직접적으로 친구들을 질타하기 시작합니다. 21-22절 보세요. “(욥 6:21) 너희도 허망한 자라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 (욥 6:22) 내가 언제 너희에게 나를 공급하라 하더냐 언제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로 예물을 달라더냐” 욥이 말합니다. “자네들도 아무 도움이 안 되네. 내가 무너진 것을 보고는 더럭 겁이 나나 보구려? 내가 자네들한테 무엇을 달라고 하던가? 돈을 달라고 하던가?” 이어서 23-24절 “내가 언제 나를 원수들에게서, 포악한 자들에게서, 구해 달라고 부탁하던가? 내게 무슨 잘못이라도 있는지 가르쳐 주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겠네.” 욥은 지금까지 친구들이 자신을 나무라고 자신을 죄인이라 정죄하며 비난하던 것을 속으로만 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고난을 당하는 자신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친구들의 매정함 앞에 이제 욥은 친구들의 자세가 틀렸음을 지적합니다.
25절 말씀, “(욥 6:25) 옳은 말은 어찌 그리 유력한지, 그렇지만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뇨” 지금 욥이 특별히 엘리바스를 콕 집어서 하는 말입니다. 엘리바스가 자신에 대하여 회개를 요청하는 책망의 말을 내뱉었지만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조차 모르겠다 거에요. “자네들의 격려 한 마디가 나에게는 무엇보다 큰 힘이 될 텐데, 자네들은 날 나무라기만 하니,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 그들이 하는 말이 욥에게 어떤 교훈도 주지 못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아무 교훈도, 도움도, 위로도 되지 않는 말을 하는 친구들이라는 것이죠.
오늘 욥이 친구들에게 하는 말 중에 관건은 27절 입니다. “(욥 6:27) 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벗을 매매할 자로구나” 욥은 이제 더욱 더 직설적으로 친구들이 매정한 자들인지 표현 합니다. “자네들은 고아를 팔아 넘기고, 친구를 돈과 바꿀 사람들일세.” 고난 중에 처한 자신이 내뱉는 깊은 한숨과 고통 가운데 탄식하고 있는 자신의 아픔을 책망하며 도리어 자신을 정죄하려는 친구들의 매정함을 욥이 강하게 질타한 것이죠. 성경에서 구약 시대에 고아와 과부는 학대 받기 쉬운 사회적 약자로서 그들을 학대하는 것은 가장 잔인하고 불의한 행동으로 정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욥의 친구들은 악덕 채무업자가 고아들을 팔아 넘기듯 욥을 학대 했습니다. 그래서 욥이 친구들을 향해서 “너희도 나를 팔아넘겼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9절 말씀입니다. “(욥 6:29) 너희는 돌이켜 불의한 것이 없게 하기를 원하노라 너희는 돌이키라 내 일이 의로우니라” 자, 여기서 이제 욥은 자신을 정죄하며 불의한 죄를 회개하라고 말하는 친구들을 향하여 반대로 그들이야말로 고난에 빠진 친구를 정죄하고 팔아버리는 불의한 일을 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자네들 이제 그만하게나. 나를 이토록 함부로 정죄하고 내 인격을 모멸하는 것은 친구로서 자네들이 할 일이 아닐세. 이것은 하나님 보실 때도 커다란 불의에 해당된다는 것을 모르는가?”
오늘 본문을 보며 저는 신약성경에 예수님께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은 “(마 7:2) 너희가 비판한 그대로 비판을 받을 것이며, 너희가 판단한 기준에 따라 너희도 판단받을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 즉 나무토막은 보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욥의 세 친구들처럼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는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우리 스스로의 불의한 모습은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않을까요?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해서는 예민한 영적 분별력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두 가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고난에 빠진 자들을 비난하고 질책하기 보다는 격려하고 위로하는 자세를 가질 것,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보다는, 내 안에 있는 죄들을 발견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것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는 보면서 우리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오늘 이 새벽 우리의 마음을 다시 점검해 보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