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27 영적 지구력을 키워라 (욥기 6장 1-7절)

욥기 4-5장 긴 시간 동안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욥을 코너로 몰았습니다. “욥 자네가 이렇게 재앙을 당한 것은 다 자네의 죄 때문이라네. 지금이라도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게나. 그러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고쳐주실 것이야.”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께 지은 죄를 실토하고 회개할 것을 종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 답답합니다. 평상시 누구보다 경건하게 살아가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해온 욥이기에 하나님 앞에 내놓을 마땅한 죄가 없었습니다. 억울함에 쌓인 욥은 친구 엘리바스의 이야기를 다 듣고 이제 또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1-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욥 6:1)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욥 6:2) 나의 분한을 달아 보며 나의 모든 재앙을 저울에 둘 수 있으면 (욥 6:3) 바다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럼으로 하여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2절에 ‘분한’이란 말은 분하고 한스러운 마음입니다. 쉽게 말하면 억울한 마음이죠. 자신의 억울함과 자신이 당한 모든 재앙이 얼마나 무거운지, 저울 위에 한 번 올려놓고 무게를 재보고 싶다는 거에요. 3절, 틀림 없이 바다의 모래보다 무거울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바다에 있는 모래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숫자도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 만큼 자신이 당하는 억울함과 고통은 셀 수 없고 무게를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무겁다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3절 후반부에 말이 중요합니다. “그럼으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원래 글이란게 정적인 요소가 있다보니까 문맥을 이해하지 않고 읽으면 그 뜻이 오해가 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의 장면을 생각해보겠습니다. 각각 국민학생 아들을 둔 두 어머니가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습니다. 그 중 공부를 잘 하는 아들을 둔 어머니가 자식 자랑을 합니다. “우리 아들은 어쩜 그리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지 몰라. 글쎄 지난 번에는 전국 수학 경시 대회 나가서 상장 받아오더니, 이번에는 운동회 나가서 달리기 금상까지 받아 왔어.” 테이블 맞은편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어머니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너 아들 참 잘 났다.” 마지막 이 말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똑 같은 말이라도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당신의 아들 정말 능력이 좋군요!”라는 의미 일수도 있고, “그래, 알겠으니 네 아들 잘난 척 좀 그만해라!”란 식의 의미도 됩니다. 똑 같은 말이라도 ‘어투’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거죠. 사실 욥기를 보면 욥은 이런 식의 비꼬는 듯한 말들을 여러 번 사용합니다. 그래서 오늘 3절 후반절에 기록된 말씀 “그럼으로 하여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이 말은 “엘리바스, 자네 말을 듣고 보니 제가 말 실수를 했구려…” 이런 인정의 표현이라기 보다는, “엘리바스 자네는 내가 당한 억울함과 고통의 무게를 알기는 하는가? 자네는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말하는구만? 아이고, 내가 말 실수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비꼬듯이 말하고 있는 거죠.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6장에서 욥은 자신의 입장을 바꾸지 않고 계속해서 “죽고 싶다. 그만 죽여달라”란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영어 성경 중에 Message 성경이 있습니다. 성경을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번역한 성경인데요. 그 성경에서는 3절의 이 표현을 익살스럽게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 “내가 창살에 갇힌 고양이처럼 날카롭게 우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욥은 자신의 처지도 이해해주지 못하고 계속해서 죄를 회개하라고 말하는 친구 엘리바스가 못 마땅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 6장 4절부터 욥의 심경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앞서 어떤 고난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던 욥… 그러나 이제 지속되는 고난 앞에 그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탄식의 말을 내뱉기 시작합니다. “(욥 6:4)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욥은 이제 자신이 당한 이 모든 고난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고백합니다.하나님께서 욥을 향해 화살을 쏘셨습니다. 화살이 욥의 몸 깊숙히 박혔고, 화살촉 끝에는 맹독이 발라져 있습니다. 욥이 지금 하나님을 마치 자신을 향해 독화살을 쏜 궁수로 표현하고 있는 거에요. 하나님이 하늘에서 활시위를 당기시고 자기를 겨냥해서 쏘신 거에요. 욥은 자신이 지금 죽어가고 있는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인간적으로 욥을 보면 참 그가 당하는 고난과 아픔이 얼마나 심했으면 그 경건한 의인 욥이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 탄식과 원망을 쏟을까 하는 이해도 됩니다만, 신앙적으로 욥을 보면 초기 그가 고백했던 위대한 신앙의 고백을 저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도 남습니다.
4절 후반부를 봅시다.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욥은 지금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해 전투태세를 펼치시고 계신 것 같아 두렵습니다.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시는 것만큼 세상에 든든한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반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적이 되시는 것만큼 세상에서 두려운 것도 또 없습니다. 욥의 심리가 느껴지시죠? 욥은 지금 하나님이 자기를 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치시는지 알 수 없으나, 연거푸 재앙을 내리시는 하나님이 두려운 거에요.
욥은 엘리바스에게 자신이 왜 이렇게 탄식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5절 봅시다. “(욥 6:5) 들 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여기 보면, 먹을 풀이 있는데 들나귀가 울 이유가 무엇이 있겠어요? 먹을 꼴이 있는데 소가 무엇 때문에 울겠습니까? 욥은 들나귀나 소가 먹을 것이 없어 우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비참한 환난에 빠진 자신이 울부고 탄식하는 것도 분명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 아니겠는가? 하고 엘리바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죠. “엘리바스 자네, 정말 내가 왜 이렇게 탄식하고 아파하는지 이해가 안 되나? 내 형편 좀 보게. 내가 당하는 고통 좀 보게. 풀이 있으면 나귀가 왜 울고, 꼴이 있으면 소가 왜 울겠는가? 나 역시 고통이 없다면 왜 이렇게 탄식하겠는가?” 욥은 자신의 처지와 형편은 전혀 개의치 아니하고 맹렬히 자신을 정죄하는 엘리바스를 간접적으로 질책하고,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친구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 하였습니다.
6-7절에 아주 흥미로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욥 6:6)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욥 6:7) 이런 것을 만지기도 내 마음이 싫어하나니 못된 식물 같이 여김이니라” 우리가 국이나 찌개를 먹을 때, 맛이 싱거우면 어떻하죠? 소금을 넣어서 간을 합니다. 음식은 맛있게 먹는 게 좋지, 고혈압이 있거나 당뇨가 없는 이상 뭐 굳이 싱거운 음식 먹을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지금 욥이 이런 말 하는 거에요. 세상에 아무 맛도 없는 음식, 대표적인 예로 계란의 흰 자 같은 부위를 소금 없이 먹는 것에서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거에요. 마찬가지로 지금 자신이 당한 고난이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겠고, 또 언제 끝날지도 모르겠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발견할 수 없는 이 고난의 상황을 아무런 탄식도 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삼켜내라고, 감당하라고 권면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거에요. 7절에 “이런 것을 만지기도 내 마음이 싫어하나니 못된 식물같이 여김이니라”는 말에서 “이런 것”이란 욥의 고난을 상징하기도 하고, 엘리바스의 권면을 뜻하기도 합니다. 욥은 자신이 당한 고난에 대해서 이런 싱거운 음식을 만지기도 싫고 먹기도 싫어하는 것처럼,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고난을 그저 묵묵히 삼키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것이죠. 욥은 엘리바스에게 “자신이 고통 가운데 탄식하는 것이 정당한 반응 아니냐?” 하고 반문하고 있는 거죠. 또한 “자네는 친구가 되어가지고 어떻게 그렇게 내 아픔을 이해하기고 위로하기는커녕 나를 정죄하고 비난하는가?” 하고 아쉬움과 원망의 마음을 내비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억울한 고난, 이해할 수 없는 환난이 찾아올 때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욥은 처음에는 잘 인내 했습니다. 고난 가운데도 입으로 범죄치 않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아픔이 길어지자, 어느 새 자기도 모르게 자기의 삶에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고, 하나님 앞에 탄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오래도록 이어지는 삶의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랜 세월 기도해도 응답되지 않는 일들에 대해서 탄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연약 하기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욥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실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어려움 가운데서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연약함 입니다.
신앙생활은 오래 달리기와 같습니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려야 하는 것처럼, 지구력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아랫 입술을 꽉 깨물고 버텨야 할 때도 있습니다. 성경의 믿음의 선배들을 보십시오. 그들 또한 오랜 세월 인내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렸습니다. 혹시 지금 내 삶에 길게 이어지고 있는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도해도 응답되지 않는 일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실망과 좌절을 경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믿음은 꾸준함을 요구합니다. 깊은 우물 속에서 물을 길러내기 위해서는 두레박이 올라올때까지 줄을 계속 당겨야 하듯이, 은혜의 두레박이 올라올 때까지 기도의 줄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힘들 수 있습니다. 아플 수 있습니다. 눈물이 날 수도 있습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버티십시오. 얍복강에서 밤새 천사를 붙들고 씨름한 야곱처럼 버티십시오. 고난은 반드시 끝이 있고, 그 뒤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도 힘들어도 하나님만 붙들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선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며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