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24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신뢰하라 (욥기 5장 1-7절)


하나의 장면을 상상해 보고자 합니다. 한국의 어느 한 중학교 교실에서 학생의 지갑이 사라졌습니다. 학급 선생님이 나를 범인으로 지목했습니다. 나를 교무실에 데리고 간 선생님이 엄중한 목소리로 나를 다그치기 시작합니다. “선생님한태만 솔직하게 이야기해봐. 선생님이 용서해줄께.” 억울합니다. 분명 그런 일 한 적도 없기에 억울하고, 평상시 내 행실이 나쁜 것도 아니고,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생각되기에 눈물이 핑 돕니다. 내가 훔친 것이 아니라고 몇 번이고 이야기 해 보아도 선생님이 믿어 주질 않습니다. 선생님은 이미 내가 훔친 것이라고 확신하고 계십니다. 얼마나 억울할까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장면이 이와 비슷합니다.
욥은 자신이 당한 고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죄 없는 자에게 까닭 없이 고난을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그의 친구 엘리바스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리 없다며, 욥이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이런 무시무시한 심판과 벌을 내리셨다고 그를 코너로 몰고 있습니다. 욥기 5장은 4장에 이어서 엘리바스가 욥에게 죄가 있음을 지적하며 죄인의 최후는 멸망이니 어서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주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1-7절까지는 악한 삶을 사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필연적인 고난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엘리바스는 1절에서 욥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욥 5:1) 부르짖어 보아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 “욥아, 너가 지금 죄를 지어 불의한 상태인데 하나님이 너의 기도에 응답하시겠느냐? 너가 힘들다고 하늘에 외쳐 본들 거룩한 천사들도 너의 기도를 외면 할거야.”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엘리바스의 주장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자,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지금 욥은 죄를 지은 상태이기 때문에, 고난을 해결하려는 기도보다, 회개 기도가 우선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답답합니까? 욥기 1장에서 살펴 보듯이 욥은 매사에 경건하게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뭐 특별히 잘 못한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처럼 심한 벌을 받을 만한 죄가 없습니다. 차라리 자신이 죄를 지었으면 눈물, 콧물 다 쏟고,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목청이 찢어져라 부르며 회개기도라도 할탠데 욥은 너무 답답할 뿐입니다. 그런 욥의 마음도 모르고 엘리바스는 계속해서 욥을 코너로 몹니다. 2절 보겠습니다. “(욥 5:2)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이보게 욥,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인다는 것을 아는가?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한다는 거 아는가?” 무슨 말입니까? 욥에게 이런 죄가 있음에 틀림 없다는 거에요. 엘리바스는 지금 돌려서 말하고 있지만 계속해서 욥을 정죄하고 있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3절 보시겠어요? “(욥 5:3) 내가 미련한 자의 뿌리 박는 것을 보고 그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노라” “욥, 자네 자꾸만 이렇게 오리발 내밀건가? 내가 하나님을 떠난 어리석은 사람이 잠시 성공하다가, 갑작스런 재앙으로 망하는 것을 보았다니까? 자네 자꾸만 이렇게 아닌 척해도 자네가 이렇게 갑작스런 재앙으로 망한 것을 보니 자네 분명 죄가 있는 거야.” 갈수록 욥을 정죄하는 엘리바스의 말이 직설적으로 바뀝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욥 5:4) 그 자식들은 평안한 데서 멀리 떠나고 성문에서 눌리나 구하는 자가 없으며” 악인의 자녀는 삶이 평안치 않고, 성문에서 사람들에게 매를 맞아도 구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거에요. 저는 성경을 읽다가 요 대목에서 엘리바스라는 사람에게 정말 정이 뚝 떨어졌어요. ‘이 사람 욥의 상처는 안중에도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욥은 불과 일주일 전에 일곱 아들과 세 딸을 다 잃었습니다. 부모에게 있어 자식이 자기보다 먼저 죽는 것보다 더 슬프고 힘든 것이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자식이 아프려면 차라리 내가 아프고, 자식이 죽으려면, 차라리 내가 죽으려는 것이 부모 마음이건만 엘리바스는 자녀를 잃은 욥에게 하는 말이 “자네 자녀들이 그렇게 된 것도 다 자네 죄 탓이라네.”하는 식의 말을 건네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심판의 원리에서 나온 말입니다만, 일주일 전 자녀를 잃고 비통해 하는 욥에게 해서는 안 될 바늘과도 같이 뾰족한 말입니다. 엘리바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시처럼 욥의 마음을 찔렀습니다. 지금 격려와 위로의 말을 줘도 부족한 이 때에 그는 욥을 정죄하고 질책하므로 그의 아픔을 가증시키고 있는 것이죠. 5절은 이제 욥이 빼앗긴 재산에 대한 해석입니다. “(욥 5:5) 그 추수한 것은 주린 자가 먹되 가시나무 가운데 있는 것도 빼앗으며 올무가 그의 재산을 향하여 입을 벌리느니라” 욥이 전 재산을 잃어버린 것도 그의 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엘리바스는 아무런 이유없이 고난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6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욥 5:6) 재앙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고난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욥이 당한 고난은 티끌이나 흙에서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나온 것이 아니라, 그가 지은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엘리바스가 언급한 내용을 통해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6절에서 그가 언급한 것처럼 분명 삶의 고난이라는 것이, 아무 이유 없이 어디선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며 다스리고 계신 것을 믿습니다. 하늘을 나는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만일 우리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죄를 깨닫게 하신다면, 반드시 죄를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의 삶 가운데 이해할 수 없는 고난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엘리바스처럼 모든 고난을 원인을 죄로 연결시킬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의인들도 삶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서 흉년을 맞이했고, 이삭은 자신을 괴롭히는 가나안 사람들 때문에 계속 이사를 다녔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피해 도망쳐야 했고, 복음을 전하던 바울은 폭풍을 만나 배가 난파 당하고 독사에게 물리기까지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들의 삶에도 고난은 찾아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민감해야 하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이 사건들을 통해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을 때에라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 삶을 붙들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이 하루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신뢰하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