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630 화평으로 의의 열매를 거두자 (야고보서 3 13-18)

그리스도인은 언어와 행실에서 세상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사는 기준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의 언어생활에 대해서 언급 하였고,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선한 행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 교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성경 내용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서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기고 총명하게 생각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지식을 가지고 다른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진리를 설파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실생활에서는 사람들과 다투고 분쟁을 일으키는 자가 되었다는데 있습니다. 1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약 3: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야고보는 사랑의 메시지를 가르치면서도 다툼과 분쟁의 주범이 되고 있는 자들의 어리석고 악한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참으로 자신들이 가르치는 말씀을 진리로 여기고 있다면 마땅히 삶에서도 분쟁과 다툼이 아닌, 온유함으로 상대방을 대하는 지혜를 나타낼 것입니다.

여기서 온유함이란 연약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서 있는 심령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으면, 어떻게 스스로 지혜 있고 총명한 자라고 자랑하며 형제들과 다툼을 일으키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심령을 가지고 “내가 옳고 너는 틀리다.”하고 비난하고 분쟁을 일으키겠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총명을 가진 자일수록 더욱 형제들 앞에서는 온유한 성품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견해와 내 주장이 옳다고 상대방에게 시비를 걸고 다툼을 일으키며 싸우는 것은 결국 스스로 미련한 자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차례 하나님의 자녀 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다투고 분쟁하는 것을 강하게 경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에 사도 바울은 성도가 다른 성도에 대하여 고소장을 접수해서 세상 재판소에 서게 되면 이미 실패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보다는 차라리 한 쪽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주고, 차라리 속아주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참 이상하죠? 우리가 언뜻 생각할 때는 교회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진실을 밝혀내서 사람들에게 오해 받고 욕 먹고 있는 그 억울한 부분을 푸는 것이 당연해 보입니다. 또한 다른 누군가에게 속아서 위기에 처하면 그 속인 자를 처벌하는 것이 마땅해 보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세상적인 차원으로 교회를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차원에서 교회를 보았습니다. 교회 내에서 분쟁과 다툼으로 인해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세상 법정에 서서 서로 ‘니가 옳다 내가 옳다’가 하고 서로 싸우느니 차라리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억울한 일을 당해주라는 것입니다. 싸워서 이기려 하지 말고 그냥 싸움에서 지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 인간의 본성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내용입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대응하는 것이 맞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들이 서로 싸우고 다투며, 세상 법정에 나가서 세상 사람들 보는 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먹칠하지 말고 차라리 온유한 태도로 억울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한국 교회 안에서 성도가 다른 성도들을 고소해서 법정에 서게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런 다툼과 분쟁 속에서 교회는 얼마나 큰 상처를 받고 있습니까? 또한 그런 교회를 보며 세상은 얼마나 하나님을 욕하고 무시하고 있습니까? 교회가 분열하고 싸우는 모습들을 보며, 교회에 등을 돌린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교회 한 번 가 볼까?’하다가도 세상 사람들보다 더 더럽고 더 추하고 악한 모습 보고 교회 오는 발걸음을 돌이키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지혜롭고 총명한 자들일수록 상대방에 대하여 온유함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14절을 보겠습니다. “(약 3: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여기서 ‘독한 시기’란 13절에 나오는 ‘온유’와 반대된 마음으로 우리 내면 속 존재하는 ‘악한 동기,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고, 흠 잡는 것을 말합니다. 상대편이 미워서 그에 대해서 뒤에서 험담하고 비방하는 것이 ‘독한 시기’ 입니다. ‘독한 시기’와 ‘다툼’의 마음은 상대방보다 내가 더 우월하다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그 아무개 집사가 뭘 알아? 그 사람이 뭐 얼마나 잘났다고 그래?”하며 상대방을 깔보고 무시하는 교만한 마음입니다. 야고보는 이런 마음을 가진 것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으면 결코 자신을 자랑하듯 내새우기보다는 잠잠하라고 말했습니다. 독한 시기와 다투고자 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내새우는 것은 진리를 거스려 거짓을 말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집사님 잘 못 한 거야? 나는 잘 못 한 거 하나 없어? 그렇지? 나는 선하지만. 그 사람은 악한 거야. 나는 지혜롭지만, 그 사람은 미련한거야.” 이런 식으로 상대방을 욕하고 동시에 자신을 정당화 하는 대화가 교회 안에서 큰 독이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상식 이하로 대한다고 나도 그에게 고대로 복수하면 그 사람이나 나나 사실 다를 게 없습니다. 상대편이 내게 상처를 준 것에 대하여 복수의 칼을 갈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아직도 미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 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어떻습니까? 상대방의 연약한 부분이 클수록 그보다 더 큰 산과 같은 마음으로 온유한 태도로 그를 품을 수 있는 사람 입니다.

“내가 옳다. 내가 선이고 너는 악이다!”하고 분쟁과 다툼을 일으키는 지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지혜가 아닙니다. 15-1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약 3: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약 3: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상대방을 파멸시키는 지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지혜가 아닙니다. 15절에 분쟁을 일으키는 지혜가 ‘세상적’이라 함은 이 지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욕심을 이루려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지혜가 ‘정욕적’이라는 것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말씀으로 분별하여 행동하기 보다는 동물처럼 본능에 이끌려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분쟁을 일으키는 지혜가 ‘마귀적’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지혜가 절대 성도들 사이에 다툼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지식 때문에 다른 이들과 분쟁만 커진다면 그것은 참된 지혜가 아니라 마귀적인 지혜입니다.

성도들 가운데 시기와 시샘이 있고 다툼과 분쟁이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마음에 참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약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는 성결합니다. 도덕적으로 보나 영적으로 보나 결함이 없습니다. 다투고 분쟁하는 것은 어느 면모로 보나 옳지 않기 때문에 성결한 지혜가 아닙니다. 그 다음 하나님께서 주신 참 지혜의 모습을 보니 ‘화평, 관용, 양순하고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 합니다. 쉽게 말하면, 상대방에 대하여 존중할 줄 아는 자세 입니다. 상대방의 논리가 나와 다르더라도 화를 내지 않는 성품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마음이며, 다른 이의 어려운 형편을 보고 그에게 실제적으로 도움을 베푸는 것 입니다.

이 당시 교회 안에는 내부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성도들이 서로 다투고 싸우는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났습니다. 조금 성경을 안다고 서로 “내가 옳다 너는 틀리다” 싸우고, 상대방에 대하여 비방하고 욕하고 저주하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러한 교회 모습을 보고 너무나도 가슴 아파했습니다. “교회는 본래 이런 곳이 아닌데…” 교회를 분열시키고 성도들 사이에서 다툼을 일으키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아닙니다. 아무리 제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해도 그것은 세상적이며, 정욕적이며 마귀적인 지혜 입니다.

참 지혜는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교회 성도들에게 ‘화평케’하는 삶을 살 것을 강조했습니다. ‘화평’이란 무엇입니까? 타인을 존중히 여기고 그를 이해하는 삶, 이것이 바로 ‘화평’의 삶입니다. 18절 보겠습니다. “(약 3: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화평케 살아가는 삶 이것은 단순히 도덕적인 차원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팔복에 대하여 이야기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가 서로 서로의 약점과 단점을 비난하거나 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서로의 약함을 품어주고 감싸주고 이해해주고, 서로 더 잘 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고, 힘내라고 위로해주고… 그렇게 우리가 함께 화평한 모습으로 교회를 세워나가는 모습을 보고 세상은 우리를 향해 “그래 저 사람들이야말로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하고 반응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속해 있는 가정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우리가 속해 있는 코너스톤 교회의 어떤 모습입니까? 화평한 공동체 입니까? 아니면 다툼과 분쟁이 있는 곳입니까? 우리가 더욱 화평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 우리가 오늘 지혜롭게 해야 할 일들은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가 위로부터 온 지혜로 화평하게 되기 위해 우리 각 사람이 감당할 일은 무엇입니까? 서로 용서해주십시오. 서로 계속해서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이런 진실한 하늘의 화평이 머무는 주님의 가정, 주님의 교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