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26 또 하나의 예수 (사도행전 9장 32-42절)

스데반 집사 순교 이후, 성도들은 유대인들의 핍박을 피해 예루살렘을 떠나 다른 도시들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 결과 베드로는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성도들을 돌보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으로서 타 지역에서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에게 어려움은 없는지 방문하는 시찰 여행으로 보입니다. 그러던 중 그는 ‘룻다’라 이름하는 도시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룻다는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40km 지점에 위치한 해안 도시 입니다.

베드로는 룻다에서 애니아라는 성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지난 8년 동안 중풍병으로 앓고 침상에 누워 지낸 사람입니다. 여기서 그가 상 누워 지냈다는 말은 그가 거동 할 수 없는 중병에 걸린 것을 말해줍니다. 사람이요, 중병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하고 침대에 1년만 누워 있어도 얼마나 마음이 착잡 하겠습니까? 실제로 하루 종일 침대에만 누워 있는 환자들에게는 우울증도 찾아오고, 때로는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하고 자살 충동도 느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애니아는 1-2년도 아니고 무려 8년 동안이나 상에 누워 지냈습니다. 그의 마음이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요?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앞으로 남은 인생도 이대로 침대에 누운 채 누군가의 도움을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8년 동안 중풍병을 고치려고 안 해 본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도 애니아의 병을 고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 애니아에게 찾아온 베드로, 그는 이미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은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능히 애니아도 고치실 수 있을 것이란 강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리에 누워 있는 애니아를 향하여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베드로의 이 말에는 그 어떠한 불치병이라도 예수님께서 능히 고쳐 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치유 기적과 예수 그리스도를 결부시킴으로써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진정한 치료자로 확실히 믿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베드로가 애니아에게 한 말을 한 번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애니아를 향하여 단순히 “애니아야 일어나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니아야 일어나서, 자리를 정돈 하십시오.” 이러한 그의 어투는 바로 그의 스승이었던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 살아 생전에 사람들이 중풍 병자 한 사람을 자리에 눕힌 채 데리고 나온 사건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중풍 병자를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예수님은 몸이 아파 일어나지 못했던 중풍병자에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가 누워 있던 그 침상을 직접 짊어지고 걸어서 집으로 가라는 아주 시각적인 모습으로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시각적인 표현을 통해 치유의 즉각적인 역사를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그의 스승이 하신 말씀처럼 즉각적인 치유의 역사를 믿으며 중풍병자를 향해 말했습니다. ”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베드로가 예수님처럼 믿음으로 선포하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지난 8년간 상에 누워 일어나 보지 못한 애니아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아 모습을 본 룻다 지역주민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치유의 기적을 보고 예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베드로가 중풍병자를 고친 소식은 급속도로 사방에 있는 마을들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룻다에서 약 11kM 떨어진 또 하나의 해안 도시 욥바에 있는 교회 성도들에게까지 베드로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 도시에는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에 앞장 서서 사람들을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이에 성도들은 그녀의 시체를 씻어 다랍에 뉘어 놓았습니다. 이미 장례 절차에 들어간 다비다의 죽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다비다의 죽음 앞에 큰 슬픔에 빠진 성도들은 때 마침 ‘룻다’에서 놀라운 치유의 기적을 일으킨 베드로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베드로로 하여금 욥바에 올 수 있도록 간청하였습니다. 이미 다비다가 죽었는데 왜 베드로를 부르러 간 것일까요? 혹자는 베드로에게 장례예배를 인도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욥바에 사는 성도들이 베드로가 다비다를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욥바에 도착한 베드로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다비다의 시체가 누워 있는 다락에 올라가게 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눈물을 흘리며 베드로에게 다비다가 살아 생전에 그들을 위해 만들어준 속옷과 겉옷을 보여 주었습니다. 오늘날에야 T-shirt 선물이 대수롭지 않지만, 방적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고대 사회에서 옷은 만들기도 어렵고, 가격도 비쌌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비다가 얼마나 큰 희생과 수고로 성도들을 사랑했는지 엿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죽은 지 한참 지나버린 다비다를 향해 말했습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이 말 역시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비슷합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릴 당시 예수님꼐서는 “소녀야 일어나라!”(달리타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께 하신 그대로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자, 또 다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분명 숨을 거두고 죽었던 다비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자 욥바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다비다를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행한 이런 기적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행하셨던 기적을 연상시킵니다. 베드로가 행한 기적은 베드로의 능력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기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승천하시고 제자들을 떠나셨지만 성령으로 제자들과 함께하시며 그 능력을 여전히 발휘하고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기적들로 인해 베드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여지며 많은 사람이 주를 믿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과 섬김을 통해서도 우리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러나고, 그것을 통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남은 생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섬김을 통하여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