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13 성령은 속일 수 없다 (사도행전 5장 1-11절)

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타려고 하면 반드시 엑스레이를 통과해야 합니다. 아무리 비밀스럽게 물건을 가방 깊숙한 곳에 꽁꽁 숨겨놓아도, 엑스레이를 통과하게 되면 훤히 다 들여 보이기 마련입니다. 엑스레이 앞에 감출 수 있는 물건이 없듯이, 하나님의 눈 앞에서 감출 수 있는 마음은 없습니다. 아무리 겨울 옷과 같이 두꺼운 옷을 입고 우리 마음을 꽁꽁 감싸보아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벌거벗은 것처럼 들여다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감출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것보다 더 자세히 우리의 마음을 살피고 계십니다. 우리가 교묘한 말과 그럴듯한 제스처로 다른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동기와 생각을 알고 계신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시편 139편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말하기를 “(시 139:2) 내가 앉고 서는 것을 아시고 멀리에서도 내 생각을 아시고 (시 139:3) 주께서는 내가 길을 다니는 것과 내가 눕는 것을 아시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을 샅샅이 알고” 계신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모르시는 것이 없으십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심지어 우리의 머리털이 몇 개가 있는지 그 숫자까지 다 알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내가 모르는 내 자신의 모습까지도 하나님은 나에 대해서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감추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 앞에 거짓말한 한 부부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남편의 이름은 아나니아, 아내의 이름은 삽비라 입니다. 당시 배경을 살펴보면, 초대교회 안에서는 몇몇의 성도들이 자신의 집이나 밭과 같은 소유물을 팔아 그 돈으로 가난한 성도들을 도왔습니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이나 인정을 받으려고 자신의 소유를 판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귀해서, 거저 주신 주님의 사랑을 따라 자신의 것으로 다른 이들을 섬기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들의 이런 선한 동기에서 우러나온 진심 어린 섬김과 사랑은 뭇 성도들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자연스럽게 교회 안에서는 이런 귀한 희생적 사랑을 선택한 자들을 우러러 보고, 존경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성도 중에 아나니아가 있었습니다. 그 역시 앞에 자신의 소유를 팔았던 이처럼 교회 안에서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인정받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아나니아도 앞선 사람들의 선행에 감동하여 자신의 소유를 팔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소유를 판다는 것은 엄청난 결정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이러한 희생에 대해서 강요하거나 강제성을 둘 수 없고, 다만 자발적인 섬김으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소유를 팔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막상 집도 팔고, 부동산도 팔고 보니, 그 값이 상당합니다. 이 전부를 교회에 헌금으로 내자니 왠지 모르게 아까운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그 값 중에서 얼마를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남은 돈을 가지고 사도들에게 주었습니다.

자, 여기서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문제는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지 못한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전 재산을 팔아 그 중 반만 드려도 그것은 대단한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그 중 십 분의 일만 드려도 여전히 대단한 것입니다. 헌금이나 헌물은 강요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 양을 얼마나 내냐 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지만, 헌금을 내라고 억지로 끌거나 강요하시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게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위해 자원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것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럼 오늘 본문의 진짜 문제는 무엇입니까? 헌금을 드린 양이 문제가 아니라,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교회 앞에 드리기는 하되 얼마를 감추어 두고도 이것이 마치 소유물의 전체인냥 거짓으로 교회를 속이고 헌금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왜 자신들이 내는 헌금이 전체인 것처럼 말했을까요? 그래야지 더 멋있어 보이지 않겠어요? 그래야지 교회 내의 사람들에게 더 인정 받지 않겠어요? 사도행전 4장에 등장한 바나바 같은 사람은 자신의 소유를 팔아 나누어 주었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아나니아도 그런 존경과 인정을 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 앞에 나온 아나니아는 자신 있게 지금 이 소유가 자신의 전부인 냥 바쳤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이는 행위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속이려고 하는 사람은 갈라디아서 6장 7절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조롱하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해도 하나님 모르시겠지?” 이 얼마나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입니까? 아나니아가 소유를 판 값 중 얼마를 숨기고도 이것이 전재산인 냥 속이고 헌금하자 베드로는 성령으로 그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아나니아를 강하게 책망했습니다. 3-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행 5: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행 5: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베드로가 한 말을 자세히 주목하십시오. 땅을 가지고 헌금 하든지 그대로 소유 하든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아나니아의 자유 입니다. 그가 자기 임의대로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4절 마지막에 보니 베드로가 무엇을 책망합니까?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꼐로다.” 베드로는 아나니아가 하나님을 속이려 한 행위에 대해서 책망한 것입니다. 시편 5편 6절을 보면 “(시 5:6) 주께서는 거짓말하는 사람들을 멸망시키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리 되시는 하나님은 거짓을 행하는 자들을 싫어하십니다.

아나니아가 하나님을 속이려 하자, 하나님은 그를 치시고 즉시 그 자리에서 털썩 쓰러진 채 숨을 거두었습니다. 한 세 시간 즈음 지나자, 아내 삽비라가 이 사건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 채 사도들 앞에 나왔습니다. 베드로는 한 번 더 기회를 주었습니다. “말해 보아라. 너와 아나니아가 땅을 팔아 받은 돈이 이것뿐인가?” 삽비라가 대답했습니다. “네, 그게 전부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어째서 서로 짜고 주의 영을 시험하려고 하느냐? 보아라. 네 남편을 묻은 사람들이 문 앞에 있으니 이번에는 너를 메고 나갈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삽비라도 그 발 앞에 쓰러져 죽었습니다.

사실 겉으로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엄청난 헌신을 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소유를 팔아서 남을 돕는 것이 어찌 쉬운 선택이겠습니까? 그러니 인간적인 관점으로 보면, 이들의 죽음이 지나친 심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 행위가 선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그 동기가 선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의 잘못된 행위를 드러내시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 입니다. 겉으로는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교회를 위한 큰 희생을 치루고 있다하더라도 교회를 섬기는 동기가 잘 못 되거나 불순 하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그 마음을 드러내시고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떤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까? 교회를 섬기는 우리의 모습 가운데 혹시 정직하지 못한 부분은 없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고 그 가운데 정직한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성도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것,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 마음 깊은 곳까지도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여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