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07 구원받을 다른 이름은 없다. (사도행전 4장 1-12절)

날마다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걷고 뛰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떻게 이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는지 알기를 원했습니다. 한참 성전 곳곳을 뛰어다니던 앉은뱅이는 베드로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고 그제서야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의 제자들인 베드로와 요한으로부터 이 모든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음을 깨닫고 깜짝 놀랐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중심으로 모여들자, 베드로는 이 때를 기회 삼아 복음을 전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건과, 이 예수를 믿기 원한다면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키라는 간단한 복음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사람이 남자만 5천명이었습니다. 그러니 여자와 아이들의 수를 더하면 대략 만 명 넘는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께 돌아왔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하루 만에 유대인 만 명이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이례 없는 사건입니다. 이 엄청난 사건은 예루살렘 성 전체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결국 이 소식은 유대인 자치기구인 제사장들에게도 전해졌고, 곧 바로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왔습니다. 이미 날이 다 저물어 가고 있었고, 해가 진 뒤에는 심문이나 재판을 열지 않는 랍비의 전통에 따라, 이튿날이 되서야 비로소 이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습니다. 재판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을 심문하고 재판했던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인들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 재판에 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들이 이제는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했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미 유대인들 사이에서 나사렛 예수는 이단으로 판결이 난 상태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유대인 사회에서 방출되는 사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공공연하게 믿음을 시인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제사장 무리는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인해 이 나사렛 이단 집단이 다 해산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또 다시 예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사건이 벌어지자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그들을 체포했던 것입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라는 이 질문에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어떤 악령의 힘을 빌려서 능력을 행하였느냐?”라는 부정적인 저의를 가진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이야말로 본 재판의 핵심 질문입니다. 베드로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유죄와 무죄로 나뉘어집니다. 베드로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도 자신의 스승처럼 십자가형에 처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글로 보기에 당시의 긴장감을 느낄 수 없지만, 한 번 우리 자신이 이 재판에 불려갔다고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주고, 예수를 인정하면 곧바로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그것도 십자가형입니다. 말 한 마디에 천냥 빛 갚는다고 하지만, 지금은 말 한 마디에 목숨이 왔다갔다할 형편입니다. 누구라도 이런 종교재판에 처해지면 등골이 오싹해 지고 이마에 구슬 땀이 흐르지 않겠습니까?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라는 이 질문에 베드로가 어떻게 대답 하느냐에 따라 그의 목숨이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어떤 사람입니까? 사람들이 두려워서, 죽음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무려 세 번이나 부인했던 이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대제사장 집에서 일하는 어린 소녀 종이 “당신 갈릴리 사람맞죠?”하고 물었을 때 그 아이를 혼내며 “아니라!”라고 말했고, 다른 사람이 “나는 당신을 분명 예수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소!”라고 했을 때 예수님을 저주하고 욕하며 부인했던 사람이 베드로 입니다. 그러니 오늘 대제사장의 이 질문이 주어졌을 때 이전의 베드로라면 또 다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면 쉽게 위기를 넘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베드로는 이전의 그 베드로가 아닙니다. 예수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도 아까지 않고 다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라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베드로는 담대하게 입을 열었습니다. 그가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9-1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행 4:9)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행 4: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베드로는 하나도 겁먹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심문하러 모인 이들 앞에서 “당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그 나사렛 예수 그리스의 이름으로 이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고 나음을 입었노라”라고 직접적으로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11절도 함께 읽겠습니다. “(행 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베드로는 시편 118편 22절을 인용하며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가장 요긴한 돌 “Cornerstone”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비유입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은, 대제사장 무리들이 사형을 언도한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그들이 부인한 예수님께서 바로 가장 귀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다고 말하며, 예수님이 바로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메시아 임을 담대히 전했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한 이 장엄한 신앙고백의 클라이막스는 12절 입니다.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베드로는 예전의 베드로가 아닙니다. 예수를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도 아깝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스승을 부인한 제자를 찾아 다시 갈릴리 바다까지 오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야말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 이심을 담대하게 증거했습니다.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과거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처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숨기고 부끄러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가 나의 구원자가 된다고 확신하는 사람에게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를 부끄러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아직 주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확실하게 믿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구원자 되십니다. 예수 외에 구원 받을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한 때 베드로도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들도 베드로처럼 주님을 부끄러워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들에게도 또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디서나 누구 앞에서나 우리 영혼의 유일한 구원자 되는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스럽게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