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31 엠마오로 갈 것인가 무덤으로 갈 것인가 (누가복음 24장 13-23절) – 고난주간 특별새벽예배 – 5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후, 그의 제자들은 낭패와 좌절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야 성경을 읽을 때 예수님께서 다시 부활하실 것을 이미 다 알고 십자가 사건을 대합니다. 그래서 사실 예수님의 죽으신 일에 대한 충격이 그렇게 생생하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다릅니다. 이들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다시 부활하실 것이란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모든 것을 다 뒤로한 채 직장도 직업도 다 버리고, 지난 3년 반 동안 예수님만 따라다녔는데 이제 주님이 무덤에 갇히셨으니 그 충격이 얼마나 크게 느껴졌겠습니까?

어떠한 의미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던 그날, 제자들의 꿈과 소망도 함께 죽은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들 안에 예수님을 가진 믿음도 다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르시기 전에 머물던 삶의 터전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제자들 열한 명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자신의 생업으로 돌아가는 장면을 통해 우리는 이들의 믿음 생활이 끝난 것을 엿 보게 됩니다. 한 때 베드로는 훌륭한 신앙고백을 했던 사람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런 고백을 했던 베드로지만, 십자가 사건 이후 그의 믿음도 다 과거형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때 뜨겁게 예수를 따르던 나머지 제자들의 믿음도 뜨거운 냄비를 추운 겨울철 마당에 내놓은 듯 순식간에 사그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십자가 사건 이후 방황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한 때는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틈만 나면 성경도 보고, 기도도 하고, 전도도 했습니다. 감자는 어디를 찔러도 감자이듯이, 어디를 찔러도 예수, 예수하고 반응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정이나 교회에서 일어난 어떠한 불미스러운 사건들 때문에 혹은 개인적인 상황이나 계기로 인해 안타깝게도 활활 타오르던 믿음이 소멸해버리는 일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보게 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했던 지난 시간들을 그리워하며 “그 때가 참 좋았는데…” 하고 회상하듯이, 과거 자신이 누렸던 신앙의 전성기만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 때는 참 열심히 신앙생활 했는데…” 그러나 막상 그 때처럼 또 다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 볼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사실 믿음 생활이란 것이 그렇습니다. 자기 혼자서 “열심히 믿어 봐야지!”하고 굳게 결심해도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린 제자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마음 속 상실감이 너무도 큽니다만 예수님 없이 자기들만으로는 도저히 다시 예전과도 같은 시간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하는 수 없이 뿔뿔이 흩어지고 만 것이죠.

제자들의 마음 속에서 사라진 것은 믿음 뿐만이 아닙니다. 소망도 사그라졌습니다. 한 때 그들에게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더 크고 위대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십자가 사건과 함께 다 한 줄기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소망이 사그러진 것에 대한 가장 슬픈 표현을 보게 됩니다. 21절을 한 번 보시겠습니까? “(눅 24: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분에게 소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아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들이 메시아라 생각했던 예수님은 로마 병사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했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함께 그들의 믿음도, 소망도 다 사라졌습니다. 이 제자들은 극심한 좌절에 빠져, 자기들 옆에서 나란히 걷고 계신 주님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제자들이 가졌던 믿음도 소망도 다 소멸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한 가지 소멸되지 않고 끝까지 남은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제자들은 다 뿔뿔이 흩어져 고향 땅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가졌던 믿음도 소망도 사라지자, 3년 동안 예수님을 섬겼지만 그 누구도 예수님의 무덤을 먼저 찾아 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각기 제 길로 가려 돌아가려 할 때 예수님이 묻혀 계신 무덤을 향해 가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사랑한 여인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오직 그녀만이 끝까지 남아 예수님께서 묻히셨던 무덤가로 나아갔습니다. 이 여인에 대하여 성경이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예수님께서 그녀를 어떤 심각한 상태에서 구원해 주신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적게 사함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하고, 많이 사함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한다는 말로 그녀가 자신을 섬기는 일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버림받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섬겼고, 끝까지 주님을 따르려 했습니다.

오늘 이 새벽 우리의 발걸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지난 과거, 한 때 열심히 신앙생활 했던 그 때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믿음과 소망은 소멸된 채 엠마오로 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믿음과 소망은 다소 냉냉하게 식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끝까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모든 슬픔과 두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여전히 예수님 계신 무덤을 향하고 있습니까?

한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예수를 따르던 저 11명의 제자들의 믿음이 소멸될 수 있었다면, 우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자신 만만하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란 것이 항상 뜨거우면 좋겠습니다만은 롤러코스터 레일처럼 위 아래로 움직입니다. 어느 때는 뜨겁다 가도 또 어느 날은 매우 차갑습니다. 소망도 그러합니다. 어느 때는 천국 소망이 선명한 듯 보이다가도 또 어느 날은 아침 안개 눈 앞 가리듯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령 여러가지 문제들과 우여곡절을 통해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주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이 사그러지는 날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주님을 향한 사랑만큼은 꼭 그대로 남겨 두시기 바랍니다. 그러하면 그 사랑이 고난과 슬픔으로 말미암아 소멸된 것처럼 보이는 믿음과 소망을 다시 한 번 불러 일으킬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누가 가장 먼저 만났습니까? 한 때 위대한 믿음을 고백했던 베드로였습니까? 아니면 예수님께 큰 소망을 가졌던 요한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여 무덤에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가 가장 먼저 주님을 만났습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귀한 은혜가 있습니다.

혹시 지금 내 믿음이 예전만큼 뜨겁지 않습니까? 신앙생활을 정말 잘 해보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막막하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떠나 보내고 방황하는 제자들처럼 다시 이전에 살던 방식 그대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목사님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까?”라고 묻고자 하시는 분들에게 이렇게 대답해 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그럼 어떻게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라는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그 분께서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가장 잘 나타난 곧이 바로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 앞에 나아갈 때 다시금 우리 안에 믿음이 탄생하고 사그라진 소망이 다시 일어나는 시간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느 날 불 같은 우리의 믿음이 사그라지고 소망이 소멸되는 것 같은 위기가 찾아와도 끝까지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할 때 우리는 절망하는 대신 믿음과 소망까지도 자라게 하는 사랑의 능력을 비로소 깨닫게 될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 중 제일은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는 남은 우리의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