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26 순종할 때 주시는 기쁨 (느헤미야 8장 14-18절)

말씀에 갈급함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라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하께 율법책을 읽다가 문득 그들의 두 눈을 사로잡는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 14-15절 말씀 입니다. (8:14) “율법책을 본즉 여호와께서 모세로 명하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은 칠월 절기에 초막에 거할지니라 하였고 (8:15) 또 일렀으되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산에 가서 감람나무 가지와 들 감람나무 가지와 화석류나무 가지와 종려나무 가지와 기타 무성한 나무 가지를 취하여 기록한 바를 따라 초막을 지으라 하라 하였는지라” 말씀을 보니 하나님께서 칠월에 초막을 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럼 초막을 짓는 초막절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초막절”은 유월절, 오순절과 함께 유대민족의 삼대절기로 뽑힙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이집트에서 노예로 비참하게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 민족은 40년간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광야에서 겪은 그 모든 어려움 가운데 보호해주시고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축제의 절기가 바로 “초막절” 입니다. 에스라 목사님과 함게 성경을 공부하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매년 7월 15일을 초막절로 지키라”고 명령하신 이 본문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때가 유대인의 달력으로 칠월이었습니다. 정확하게 7월 2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초막절을 지키라 명하신 7월 15일이 되기 13일 전입니다.

이들은 초막절을 지키라는 말씀을 읽다가 지금 자기들의 처한 상황과 본문 속에 나오는 조상들의 처지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과거에 그의 조상들이 이집트의 노예에서 해방된 것처럼, 지금 이들은 페르시아의 노예로 살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에 돌아와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율법책을 읽고 이런 감동을 받게 됩니다. “옛적에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페르시아의 노예로 살아가던 우리를 구원하셨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보호해주시고 인도해주셨구나?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또 하나의 출애굽이었구나? 그렇다면 우리를 페르시아로부터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함이 마땅하지 않은가!” 이처럼 백성들이 말씀을 읽던 중 초막절의 의미를 깨닫자, 에스라 목사님과 성경공부를 하던 백성들의 리더들은 드디어 초막절을 지키기로 결심합니다.

1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8:16) “백성이 이에 나가서 나무 가지를 취하여 혹은 지붕 위에, 혹은 뜰 안에, 혹은 하나님의 전 뜰에, 혹은 수문 광장에, 혹은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짓되” 본문의 전문맥인 13절 말씀을 보면 에스라 목사님과 성경공부를 한 것은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16절에 와 보니 지금 초막을 짓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16절의 첫 단어가 누구입니까? “백성들”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을 짓고 입니다. 성경을 읽고 말씀을 깨달은 지도자들의 영향력이 공동체 전체로 흘러갔습니다. 만약 13절에서 성경공부를 하던 족장들 제사장들 레위인들이 말씀을 깨닫고 그들끼리만 초막절을 지켰다면,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모든 백성에게 그들이 깨달은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국민 여러분, 초막을 짓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여기까지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함께 초막을 지읍시다.”

이처럼 리더들이 받은 말씀과 비전을 모든 공동체가 동일하게 공유하는 현상을 가리켜 “저변확대”라고 말합니다. 교회의 부흥은 이 저변확대를 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저변확대는 지도자들과 백성들 모두가 똑 같은 목표를 바라보고 달려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 프로젝트에서 성공한 이유도 바로 이 저변 확대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의 필요성을 알고도, 혼자서 성벽을 쌓으려 했다면 평생 쌓아도 공사가 끝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꿈과 비전을 백성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 결과 모든 백성들이 성벽 재건에 함께 참여하여 52일만에 큰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8:17)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 무리가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함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즐거워하며” 초막절은 이집트를 떠나 광야에서 살던 백성들이 지키던 절기 입니다. 이것이 모세 때에 시작하여 여호수아 때까지 지켜졌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세대에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이 아닌 성에 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스레 이 초막절은 소규모의 몇몇 사람들 사이에서만 지켜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16절 말씀처럼 온 백성이 집의 지붕 위에, 뜰 안에, 하나님의 전 뜰에, 수문 광장에,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지은 역사는 좀처럼 보기 두문 사건이었습니다. 초막절이 온전하게 지켜진 것이 얼마만에 되어진 사건인가 계산해 보니까요. 17절에서 말하는 여호수아의 때가 BC 1400 년도 즈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배경은 약 BC 440 년도 정도 됩니다. 즉 지금 이 절기가 거의 천년 만에 지켜지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 때 드디어 약 천 년 만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제대로 “초막절”이 거행 되었습니다. 이는 실로 놀라운 사건입니다.

초막절을 지키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절기를 지킬 때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이슬람의 라마단 금식 기간을 지킨다면 그 사람은 알라신을 믿는 무슬림의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반대로 매주 주일날 아침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에 온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에 기록된 “초막절”이란 절기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어찌보면, 초막 짓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사건이겠습니까? 쉽게 말하면 텐트 치는 것입니다. 일의 중요성으로 보면 그리 대수로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기억하여 그 율법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어찌 아니 기뻐하셨겠습니까? 저는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무엇이 임합니까? 17절 마지막 두 단어가 무엇입니까? “크게 즐거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자 노력하고, 그 말씀을 백성들과 함께 나누고, 또한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이 무엇입니까? “큰 기쁨” 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크게 즐거워하여” 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만 다른 번역본을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이들이 얼마나 기뻤으면 마음 속 기쁨을 감추지 못했을까요? 또 다른 영어 번역에는 “They were all filled with great joy!” “그들은 모두 커다란 기쁨으로 충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쁨으로 그들의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세상이 주는 일시적 쾌락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이 주어집니다. 한 번 따라 해 봅시다. “순종은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순종은 축복을 가져다 줍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축복을 주십니다. 이 놀라운 순종의 기쁨과 축복이 코너스톤 교회 위에도 함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