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16 내 손을 힘있게 하소서 (느헤미야 6장 1-9절)

느헤미야와 백성들은 어느 새 한 달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 생계를 내려놓고 예루살렘 성벽을 쌓는 사역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밖으로는 산발랏과 도비야와 같은 원수들이 협박과 군사적 압박으로 느헤미야와 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안쪽에서는 리더들의 ‘고리대금’이란 문제가 성벽 재건을 가로 막았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지혜를 구하며, 희생적인 리더십을 발휘함으로써 이 모든 위기를 잘 극복해 왔습니다. 그러나 적들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끝까지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을 막고자 했습니다.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6:1)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대적이 내가 성을 건축하여 그 퇴락한 곳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라” 이제 문짝만 달면 성벽 재건이 완성됩니다. 그러나 문을 달기 전까지는 끝이 아닙니다. 축구로 따지면 느헤미야와 백성들이 1:0으로 앞서고 있는 후반전 40분 상황입니다. 5분만 더 버티면 승리 입니다. 그러나 한 골 넣었다고 긴장을 풀고 있으면 얼마든지 경기가 역전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심판의 마지막 휘슬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됩니다. 느헤미야의 대적들도 끈질긴 강팀이기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공격할 것입니다. 남은 시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경기는 역전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느헤미야와 백성들의 수고와 땀으로 드디어 성벽의 모든 허물어진 곳이 다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성벽의 완성을 알리는 ‘문짝’을 아직 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이 정도 되면 성벽 재건은 어느 정도 완공 된 거라 보아도 무방했을지 모릅니다. 문짝 다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백성 수십 명이 몇 일만 일하면 충분히 끝나는 작업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 모든 역사가 끝나기까지 결코 경계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문짝이 없으면 성벽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적들은 문이 놓아져야 하는 공간을 통해 언제든지 예루살렘을 공격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이 뚫리면 결국 여태까지 쌓아올린 벽들도 무너져 내리고 말 것 입니다. 적들이 성을 빼앗기 위한 공성전을 할 때 가장 먼저 공격하는 곳, 성벽 중 가장 취약한 곳, 가장 쉽게 무너지는 곳이 바로 성의 문입니다. 따라서 이 문짝을 다는 일이야말로 사실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느헤미야의 대적들도 성벽재건에 있어서 문짝을 다는 것이야말로 성벽의완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느헤미야가 성문을 달지 못하도록 또 다시 방해작전을 시작합니다. 2절 말씀입니다. (6:2)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코자 함이라” 오노 평지는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32킬로미터 약 20마일 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느헤미야가 사는 예루살렘과 대적 산발랏이 사는 사마리아 경계 지역입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남한과 북한이 만나는 ‘JSA’공동경비구역이나 판문점 같은 접경지대 입니다. 산발랏은 자신의 병사들을 매복시키기 유리한 오노 평지로 느헤미야를 유인하여 그를 죽이고자 계획하고 있던 것이지요.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러한 적의 계략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그에 응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는 그의 대적들에게 다음과 같이 답장을 보냅니다.

3절 말씀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6:3) “내가 곧 저희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떠나 정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하매” 여기 3절에서 느헤미야가 사용한 단어들을 통해 우리는 그가 성벽 재건 사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엿 볼 수 있습니다. 3절 말씀 중간을 보니, 느헤미야가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라고 말합니다. 영어로는 “I am doing a great work.” 즉, “나는 지금 위대한 한 일을 하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성벽 재건이야 말로 큰 역사 즉 위대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가 하는 일들은 대수로운 일들이 아니었습니다. 흑 나르고.. 벽돌 나르고.. 흙먼지 날리는 공사 현장에서 벽돌 쌓는 일입니다. 남들이 볼 때는 뭐 그리 특별할 것도 없고, 그저 평범한 일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작은 일’,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일!”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적 산발랏에게, “내가 이 큰 역사,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위대한 사역을 멈추고 너에게 갈 수 없다.”고 단호하게 이야기 합니다.

일을 대하는 태도가 인생을 좌우합니다. 한 번 따라 해 봅시다. “일을 대하는 태도가 인생을 좌우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내게 맡겨주신 일을 어떠한 태도로 하고 있는가가 그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지금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이 성벽재건 프로젝트를 하며 “I am doing a great work!” “나는 지금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세로 성실하게 일하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성벽재건을 위해 벽돌을 나르고 흙을 퍼 나르는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일이며, 그 자신은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적들이 무려 네번씩이나 오노 평지로 나아오라고 거듭해서 음모를 펼쳤으나,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한다는 확실한 자부심이 있었기에 흔들리지 않고 사역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실 때 “나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하고 있노라”는 영적 자부심을 갖고 사역하시기 바랍니다.

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6:5) “산발랏이 다섯 번째는 그 종자의 손에 봉하지 않은 편지를 들려 내게 보내었는데” 거듭되는 요청에도 느헤미야가 응하지 않자, 적들은 또 다른 방법으로 느헤미야를 괴롭힙니다. 5절에 보니 산발랏은 봉하지 않은 편지를 느헤미야에게 보냅니다. 오늘날도 중요한 문서를 발송할 때는 문서를 열어보지 못하게 밀봉하죠? 마찬가지로 느헤미야 때에는 공적인 내용이 적힌 두루마리는 반드시 돌돌 말아서 끈으로 묶고 밀랍으로 봉한 뒤 반지나 도장에 찍힌 무늬로 직인을 찍어 보냈습니다. 그래서 이 문서가 수신자에게 전해지는 동안 아무도 그 내용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산발랏은 일부러 봉하지 않은 편지를 느헤미야에게 보냈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6-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6:6) “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고 가스무도 말하기를 네가 유다 사람들로 더불어 모반하려 하여 성을 건축한다 하나니 네가 그 말과 같이 왕이 되려 하는도다 (6:7) 또 네가 선지자를 세워 예루살렘에서 너를 들어 선전하기를 유다에 왕이 있다 하게 하였으니 이 말이 왕에게 들릴지라 그런즉 너는 이제 오라 함께 의논하자 하였기로” 산발랏은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여 스스로 유다의 왕이 되려 한다고 거짓 소문을 퍼트립니다.

이 소문이 왜 무서운 것이냐 하면 그것은 왕에 대한 반역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고대 제국 사회에서 반역죄는 곧 ‘죽음’입니다. 페르시아 왕들은 반역의 ‘반’자만 보여도 진실/거짓 여부 따질 것 없이 참수형에 처하고, 심지어 그의 가족들까지도 무참히 살해하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느헤미야가 왕이 되려고 한다는 소문이 페르시아 왕의 귀에 들리게 된다면 설령 그것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느헤미야는 왕 앞에 불려가 사형에 처해지던지, 아니면 평생 감옥에서 옥살이 하며 살아가야 하는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바로 적군은 이 점을 노리고 느헤미야를 모함할 소문을 퍼트리기 위하여 일부로 봉하지 않은 편지를 발송한 것이지요. “느헤미야, 네가 성벽 건축하는 이유가 유대 왕이 되려고 하는 거라며? 소문이 이미 여러 나라에 떠돌고 있다! 네가 선지자를 세워서 ‘유다에 왕이 있다’하고 선포하게 하려고 한다며? 이제 이 소문이 페르시아 왕의 귀에도 곧 들어갈 것이다! 그러니 이 일에 대하여 어서 와서 나하고 의논하자!” 이것은 고도의 심리전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적의 꾀임에 넘어갈 수 있는 그럴듯한 모함입니다. 사실 느헤미야 바로 전에 앞서 성벽 재건을 시도하던 에스라 목사님은 대적들의 이러한 모함 때문에 성벽 재건을 중단해야만 했습니다. 적들도 이러한 과거사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유사한 공격 방법을 사용해서 어떻게든 느헤미야가 협상에 응하도록 만들려 한 것입니다. 사실 느헤미야 입장에서 보면 너무도 어이가 없고 또 너무도 억울한 소문입니다.

교회도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이런 루머에 휘말릴 때가 많습니다. 주일 하루만 교회 왔다 그냥 가는 사람들은 이런 루머에 휘말릴게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늦게까지 남아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이 꼭 교회 내에서 이상한 소문을 퍼트립니다. “저 아무개 집사님 사실 저렇게 열심히 하는 거 다 꿍꿍이가 있어서 그래….” 또 어떤 사람들은 함께 신앙 생활하던 아무개 집사님이 자기 마음에 안 드니까, 자기 관점에서 억울한 듯이 사연을 짜집기 해서, 마치 자기는 하나도 잘못이 없고 몽땅 저 집사님 탓인 냥 이야기를 퍼트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 아무개 집사님이 나를 이렇게 상처 줬어. 나는 아무런 잘못도 한 게 없는데 날 이렇게 대했어.” 하고 좋지 않은 이야기들을 교회에 퍼트립니다. 이런 가을바람같이 출처를 알 수 없는 루머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8절 말씀입니다. (6:8) “내가 보내어 저에게 이르기를 너의 말한바 이런 일은 없는 일이요 네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라 하였나니” “당신이 한 말은 모두 거짓이오. 당신이 꾸며 낸 것일 뿐 실제로 그런 일은 없소!” 느헤미야는 단호한 어투로 적의 간교한 모함을 파합니다. 여러분 억울한 일 당하면, 너무 장황하게 변명하려고 서두르지 마세요. 움직일수록 더 깊게 빠지는 늪처럼 오히려 적의 간계에 더 깊게 빠지게 됩니다. 느헤미야처럼 위축되지 아니하고 단호하게 “이런 일은 없다. 네가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다!”하고 거짓 루머를 거부해야 합니다.

9절 마지막에 느헤미야가 하나님께 뭐라고 간구합니까?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느헤미야는 원수의 어떤 거짓 루머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를 끌어내리려는 사람들의 협박에도 끄떡하지 않습니다. 우리들도 느헤미야처럼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올해도 적의 공격은 계속해서 끊임없이 우리를 넘어뜨리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을 힘있게 하시기를 간구하십시오. 그리하여 우리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사명과 사역들을 끝까지 완수하실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