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시대를 모티브로 한 영화 [벤허]를 보면 주인공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문둥병에 걸리게 됩니다. 문둥병에 걸리게 되면 피부에 반점이 생기고 피부가 곪고 썩게 됩니다. 심해지면 점점 눈썹이 빠지고 사람의 손가락, 발가락이없어지고 코도 움푹 들어갑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이 질병은 주변 사람들에게 전염될 위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화 속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은 평범한 집에서 쫓겨나 문둥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골짜기에 따로 살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문둥병 환자들의 곪고 썩는 피부에 혐오감을 느꼈고, 전염될까 두려워 그들을 도시 밖으로 격리 시켰습니다.
문둥병 환자들은 밭을 갈거나 농사를 짓는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늘 먹을 것이 부족했습니다. 그렇다고 허기진 배를 채우고자 함부로 마을에 들어갔다가는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습니다. 살아 있으나 지옥 같은 삶이 있다면 바로 문둥병자의 삶이 그러 했습니다.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 삶의 아무런 소망도 없이 살이 다 곪아 썩어져 들어가 죽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 이런 문둥병자들에게 놀라운 소식이 들렸습니다.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는 사람이 병든 자를 고친다는 소문입니다. 이들도 하나님께서 구약시대 때 여러 선지자를 통해 주의 백성들의 병을 고치시고 구원해 주신 이야기들을 듣고 자라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동안 그 어떤 선지자도 나타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혜성처럼 등장한 나사렛 출신의 30대 청년 예수가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베푼다는 소식을 들으니 이들이 얼마나 만나보고 싶었겠습니까? 그렇다고 마음대로 격리 지역을 떠나서 무작정 예수를 찾아 여행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때 마침 예수님께서 그들이 머물고 있던 지역을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허다한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있으니 멀리서 봐도 예수님 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이대로 그냥 지나가시면 언제 또 예수님을 뵐 수 있을지 모릅니다. 천재일우, 천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기회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 보자고 가까이 가면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어떻게 합니까? 12절을 보니까 이 열 사람이 멀리 서서 소리를 지르며 “예수 선생님,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외쳐 댔습니다. 내 삶의 마지막 희망, 유일한 희망 되시는 분을 눈 앞에 두고 있는데 이들이 얼마나 간절하게 소리질렀겠습니까? “예수 선생님!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고 목이 다 쉴 정도로 크게 불렀을 것입니다.
만약 이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들의 간절한 외침을 무시하시고 그대로 가셨다면 어떠했을까요? 아마 문둥병자들은 평생 생지옥을 경험하며 남은 하루 하루를 절망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14절 말씀에 뭐라고 시작하고 있습니까? “보시고!” 이 단어는 그냥 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주의를 가지고 주목하여 보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불쌍한 이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반드시 응답 해 주십니다. 비록 문둥병으로 인해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지만, 예수님을 부르자 예수님이 이들을 바라보시고 이들에게 주목하셨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비록 우리 안에 문둥병과 같이 추악하고 더러운 죄가 있더라도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시고 우리 기도에 주의를 기울여 주시고 주목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도움을 구하는 이 문둥병자들을 향하여 제사장에게 가서 그들의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매우 독특한 명령이었습니다. 문둥병자는 사람들에게 함부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물며 제사장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나 불경하게 여겨지던 문둥병자가 제사장에게 나아갈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병이 나았다’는 것을 제사장에게 확증할 때 뿐 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은 ‘이미 네 몸이 나은 줄로 믿고 가거라.’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 제사장에게 갔는데 몸이 그대로였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놀라운 사실은 문둥병자들이 예수님 말씀을 믿고 그대로 갔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가라고 하시니까 두 말 않고 제사장에게 갔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저희가 제사장에게 걸어가다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이는 실로 놀라운 장면입니다. 제가 가까운 분 한 분은 어린시절 부엌에서 라면을 끓여먹기 위해 물을 끓이다가 그만 냄비를 엎어서 왼쪽 팔 어깨에서부터 팔꿈치까지 화상으로 심각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여름이 되어도 반팔을 잘 입지 않습니다. 팔 하나에 입은 화상도 그러한데 하물며 온 몸에 문둥병이 난 이 사람들은 얼마나 더 했겠습니까? 한 여름에도 살이 썩어 문드러져 가는 것을 감추려고 온 몸을 꽁꽁 감싸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다가 그 썩은 피부가 아기피부처럼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이들이 느낀 기쁨은 죽었다가 살아난 때의 느낌일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 다음 사건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15절에 보니 깨끗함을 입은 문둥병자 중에 오직 한 사람만 예수님께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발 아래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16절에 저 사람이 사마리아 인이라는 말은 이 사람은 본래 율법과 별 상관이 없이 살아간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이 사마리아인도 하나님께서 문둥병을 낫게 해 주시자 감사하는 마음으로 찾아왔는데 나머지 아홉 사람 유대인들은 감사는 할 줄 모르고 기쁨에 취해 다 제 갈 길로 갔습니다. 아홉 사람은 믿음으로 구할 줄만 알았지, 받은 복에 대해서는 예수님께 감사 할 줄 몰랐습니다. 17절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혹시 우리의 모습이 예수님께서 찾으시는 이 아홉 사람 같지는 않습니까? 올 한 해 예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많이 도와주시고 축복해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감사하시는 커녕 주신 것들만 누리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은 하나님께서 열 가지를 주셨는데 그 중 아홉은 빠뜨리고 한 가지만 주님께 감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오늘 이렇게 물어보셨습니다.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 한해를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은혜를 잊지 말고 주님께 감사드리 합니다. 어떤 분들은 받은 게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나에게 해 주신 것이 없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것을 해 주셨습니다. 지난 날 사건 사고 없이 지켜 주시고, 건강 주셔서 오늘도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새벽 예배에 나오게 해주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 많았는데 그래도 이렇게 하나님 붙잡고 있게 해 주시는 믿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병원에 가보면 얼마나 아픈 사람들이 많습니까? 우리가 숨 쉬고, 밥 잘 먹고, 걸어 다니는 것만도 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 하나 생각해보면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혹시 우리가 그 동안 하나님께 감사하는데 인색하지는 않았습니까? 열 가지를 받았는데 아홉은 당연히 주시는 것으로 생각하며 한 가지만 감사하지는 않았습니까?
오늘 이 하루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 이루어 주신 것들, 지켜주신 것들, 함께 해 주신 은혜를 생각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충만한 감사를 올려 드리는 귀한 날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