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눈으로 보이는 세계 이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이란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은 모든 세계까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계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우리처럼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초자연적인 역사로 하나님께서 다가오시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환상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야곱은 밤에 잠을 자면서 사닥다리 위에 계신 분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확실한 영적인 경험이 없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때로는 어렵기도 합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계시다고 가르치는데, 현실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괴리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현실과 신앙의 간극에서 일어나는 긴장감을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였습니다. 앗수르 군대의 지휘관 랍사게는 예루살렘 성 안으로 숨어 버린 백성들을 조롱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백성들에게 항복 할 것을 종용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라는 히스기야의 설득에 넘어가지 말아라.”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 전쟁의 위기에서 남 유다를 구원해 주실 것이란 확신이 있었고, 그의 믿음을 백성들과 함께 공유했습니다. 앗수르의 지휘관 랍사게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히스기야와 백성들의 믿음을 조롱한 것입니다. 여태까지 전쟁을 치루어 본 상대편들도 히스기야와 백성들처럼 똑같이 자기들의 신이 구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외없이 앗수르의 군대 앞에 패해버렸습니다. 따라서 랍사게는 이번에도 절대로 히스기야 말처럼 하나님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전쟁의 상황이 뒤집어 질리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랍사게는 오히려 항복하면 먹을 것이 풍족한 땅에 살 수 있다고 백성들을 현혹시켰습니다. “너희는 그와 같은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아라. 너희는 성에서 나와 나에게 항복하라. 그러면 너희가 너희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너희 우물에서 물을 마실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내가 와서 이 땅과 같은 다른 지방으로 너희를 옮겨 살게 하겠다. 그 곳은 곡식과 포도주와 빵과 포도밭과 감람기름과 꿀이 많은 땅이다. 만일 너희가 항복만 한다면 죽지 않고 이런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여호와가 너희를 구출할 것이라고 히스기야가 설득하여도 너희는 그의 말을 듣지 말아라.” (왕하 18:31-32절, 현대인의 성경) 전쟁을 포기하고 항복하기만 하면 앗수르 왕의 자비로 곡식과 기름, 과일과 음료가 풍부한 땅에 살게 된다고 하니 이 얼마나 달콤한 유혹 입니까?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랍사게의 거짓말이었습니다. 본래 앗수르는 전쟁에서 승리하면 패전 국가의 국민들이 다시 반역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아예 고향땅에서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살도록 강제 이주를 시켰습니다. 이러한 앗수르의 관행을 마치 앗수르 왕이 큰 인심을 베풀 듯이 포장한 것입니다.
랍사게의 이러한 달콤한 유혹이 사단의 유혹과도 비슷합니다. “너가 교회하나님 나가서 섬기는 것이 네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되겠니? 돈을 더 버니? 남들보다 더 편안하게 사니? 차라리 하나님 없이 세상에서 마음 것 즐기면서 살아가렴.” 히스기야를 버리고 앗수르에 항복하면 행복을 줄 것처럼 랍사게가 유혹하듯이, 사단도 여호와를 버리고 세상에 항복하면 삶이 편안해지고 행복해질 것처럼 유혹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단의 거짓 메시지 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에 항복하는 순간 누가복음 15장 탕자처럼 돼지열매 먹는 비참한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것 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참 기쁨이 아니라 허무한 쾌락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붙어 있는 것이야 말로 진짜 행복해지는 유일한 길입니다.
랍사게는 남 유다 백성들에게 히스기야를 믿지 말고, 여호와가 구해줄 것이란 헛된 소망도 갖지 말라는 의미로 여태까지 자기 신을 의지했다가 앗수르에게 패배한 나라들의 명단을 불러 줍니다. “열국의 신들 중에 그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하맛과 아르밧의 신들이 어디 있으며 스발와임과 헤나와 아와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사마리아를 내 손에서 건졌느냐 열국의 모든 신 중에 누가 그 땅을 내 손에서 건졌기에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능히 건지겠느냐 하셨느니라” (왕하 18:33-35) 랍사게는 여태까지 그 어떠한 신도 앗수르의 군대로부터 그의 나라를 구해줄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물며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별 수 있겠느냐는 식으로 유다 백성들을 조롱하며 항복을 종용했습니다.
사실 랍사게가 말한 것처럼 다른 신들이 그들을 섬기는 백성들을 구하지 못했던 이유는 당연합니다. 그 신들이 다 사람이 만들어 낸 거짓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직 여호와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시기에 능히 구원을 베푸실 수 있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아무리 랍사게와 같은 방식으로 사단이 ‘하나님이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별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식으로 우리들의 믿음을 공격해도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창조주는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야말로 이 세상의 창조자 되시고 다스리시는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랍사게는 남 유다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가 뭔가를 모르는 구나?” 하는 식으로 이야기 했지만, 사실은 랍사게야말로 정말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보이는 것으로만 구성된 세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의 세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눈에 보이는 세상 이면에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서두에 이야기한 것처럼 아브라함이나 모세, 야곱과 같은 성경 인물들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요셉, 에스더, 모르드개, 느헤미야 같은 인물들처럼 하나님을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여전히 현실의 어려운 상황 가운데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신실하게 믿음을 지킨 이들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랍사게처럼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부인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처한 현실이 어둡고 우리가 당하는 삶의 상황이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은 변함없이 존재하고 계십니다. 현실과 신앙의 사이에 서 있을 때 신앙을 포기하지 마시고, 믿음으로 끝까지 하나님을 붙드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