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11 베드로전서 강해 (13) 하나님의 양 무리를 돌보라 (베드로전서 5장 1-4절)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양 무리를 돌보는 교회의 리더들을 대상으로 쓴 권면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 코너스톤 교회 성도들이 영적 아이에서 영적 부모로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섬김을 받는 자에서 섬기는 자로, 배우는 자에서 가르치는 자로, 돌봄 받는 자에서 돌보는 자로 성숙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영적 부모가 되어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람들을 섬길 때 가져야 하는 자세와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라
첫째로, 베드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양 무리를 돌보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라고 권면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2절 상반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벧전 5:2 상반절)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베드로는 우리가 교회 성도들을 돌보고 양육하는 일을 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부득이하다’는 말은 ‘하기 싫은 잃은 상태에서 억지로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학생들에게 공부하라고 말하면 얼마나 하기 싫어합니까? 직장인들이 월요일아침에 회사로 출근하는 것을 얼마나 싫어합니까? 심지어 월요일이 싫어 새벽까지 잠 안자는 직장인들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양 무리를 돌봄에 있어,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자세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맞벌이 부부에 유치원생 자녀를 둔 학부모라고 가정해 봅시다. 아이를 하루 종일 돌봐 줄 Daycare center에 갔습니다. 담당 선생님에게 아이를 인계하는데, 선생님이 환한 표정으로 방긋 웃으면서 아이 이름을 불러줍니다. “어, 아무게야! 너 왔구나? 어서와! 보고 싶었어!”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아이를 꽉 껴안아줍니다. 아이를 두고 직장에 출근하는 부모 마음이 놓이지요. “다행이다. 참 좋은 선생님이신 것 같다.” 반대로 이런 장면을 상상해 봅시다. 담당 선생님에게 아이를 인계하는데, 선생님 표정에 이미 ‘나는 하기 싫은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하고 써 있습니다. “어, 왔어? 너가 알아서 가방은 저기 두고 오렴.” 아이를 두고 직장에 출근하는 부모 마음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서 비싼 돈 주고 Daycare에 맡기는 건데 부모 입장에서 보면 기분도 좋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자녀를 홀대하고 무시하는 것은 곧 부모 입장에서 보면 선생님이 부모 자신을 무시하는 기분일 것입니다. 아주 기분 나쁜 경험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양 무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구원하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께는 얼마나 귀한 자녀들이겠습니까? 그런데 이 양 무리를 돌보는데, 하기 싫은 일하듯이 한다면, 이 양 무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양 무리를 돌보는데 하기 싫은 일하듯이 억지로 한다면, 이는 그 양들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홀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을 하면서 속으로 “그래, 내가 해준다! 내가 참고 섬겨준다!”하며 선심 쓰듯이 억지로 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욕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양 무리를 돌 보는 일에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곧 누가 시켜서 강제적으로 하는 것처럼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목양 사역을 자발적인 마음으로 할 수 있을까요? 사실 목자가 양을 돌보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까? 목자 입장에서 보면 밤낮으로 쉬지도 못하고 땀 흘리며 하는 노동입니다. 세상에 어느 목자가 일하고 싶어서 일할까요? 하고 싶으면 목자도 은퇴하고 집에서 편히 쉬고 싶지, 누가 사자와 곰이 있는 추운 들 밖에서 야영을 하고, 낮에는 이리 떼들로부터 목숨을 걸고 양을 지키고 싶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양 무리를 돌보는 사역도 힘이 듭니다. 많은 에너지와 시간과 물질을 들여야 합니다. 사람들을 찾아가서 이야기도 들어주고, 위로해줘야 합니다. 때로는 격려도 하고, 상담도 하고, 먹이는 일, 상처 입은 자를 싸매어 주는 일, 병든 자를 돌보는 일도 해야 합니다. 목양은 고되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러한 일을 억지로 하지 않고, 자원해서 할 수 있을까요?
자원하는 마음은 주께서 나를 주의 양 무리를 돌보는 사역으로 부르셨다는 ‘소명’에서 발생합니다. 그러나 소명만으로는 자원하는 마음을 유지하기란 어렵습니다. 양 무리를 돌보고자 하는 자원하는 마음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가셔서 그에게 목양의 사명을 주시기 전에 세번이나 반복해서 물어보셨던 질문은 무엇이었습니까?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왜 예수님은 다른 질문도 아니고 이 질문을 세 번씩이나 물어보셨을까요?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자, 그와 동시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 그로 인해 주님과 깊은 사랑의 교제를 누리는 사람만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양 무리를 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란 질문에 베드로가 “네, 주님!”하고 대답할 때 비로소 “그럼 나의 양 무리를 돌보아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주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 또한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그리하여 주님과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자원하는 마음으로 양 무리를 돌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코너스톤 교회 성도들을 돌보고 양육하는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듯 섬기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면, 잠시 멈춰 서서 예수님을 향한 여러분의 마음을 점검하십시오. ‘나는 지금도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주님과의 깊은 교제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언제나 참된 목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 사랑을 풍성하게 누리는 사람만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목양을 감당합니다.
분명 저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목회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제 부모님의 소원에 따라 이름도 ‘영목’이라 지음 받았습니다. 제 이름의 ‘목’자는 한문으로 ‘양을 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저 역시 누가 등 떠밀어서 목회를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자라면서 부모님은 한 번도 저에게 목회자가 되라고 강요하신 적이 없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수련회 마지막 날 밤, 모든 집회가 끝나고 자정이 넘도록 강당에 홀로 남아 엎드려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벅차올라 눈물과 기도를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 제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립니다. 제 몸도, 제 삶도 주님께 드립니다!” 지금도 그 때의 고백으로 목회합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누가 시켜서 등 떠밀려 억지로 한다면 죽기보다 하기 싫은 것이 목회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하여 자원하여 하는 것이 목회라면, 세상에서 이보다 더 영광스럽고 행복한 직업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치지 않고 fresh 하게 사역하는 비밀이 여기 있습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주님과 풍성한 교제를 누리는 삶을 끊임없이 살아가십시오. 오직 그러한 사람만이 억지로 섬기지 않고, 자원하여 자발적으로 양을 돌보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2.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라
둘째로,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양 무리를 돌보되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2절 하반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벧전5:2 하반절) …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본문에서 말하는 ‘더러운 이’란 물질적인 이익을 의미합니다. 쉽게 설명하면 돈 때문에 목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조금 더 확장하면 물질적인 축복을 위해서 양 무리를 돌보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이렇게 양을 돌보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물질적인 복을 주시겠지?”라는 잘못된 동기로 사역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또한 어떤 성도를 돌보고 양육할 때 “이렇게 하면 저 사람이 나에게 어떤 대가를 주겠지?”하는 마음으로 금전적, 물질적 보상을 원하는 마음으로 양무리를 돌보지 말라는 뜻입니다.
참 부끄럽습니다만, 실제로 목회자들 중에도 돈 때문에 사역하는 분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헌금을 몰래 훔치는 목회자, 교회 헌금을 자기 멋대로 쓰고, 사적인 일에 남용하는 목회자들도 있습니다. 돈을 축적하는 맛으로 목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럼 저에게는 물질적인 유혹이 없을까요? 저도 연약한 죄인인데 왜 없겠어요?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시 때때로 제 스스로에게 혼잣말하며 다짐해 봅니다. “영목아, 너가 부자 되려고 목회하느냐? 너 남들보다 잘 살려고 목회자가 된 것이냐? 그렇지 않다. 세상에 돈 잘 버는 직업이 얼마나 많은데? 돈을 많이 벌려고 한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잘 살려고 이 일을 하는 거라면, 지금 당장 그만두고 다른 일해라! 세상에 할 일이 없어서 돈 벌려고 목회하느냐?” 수많은 선배 목사님들이 무너지는 원인을 보니까 크게 세가지 더라고요. 여자 문제, 권력 문제, 돈 문제… 특히 돈 문제 때문에 넘어지는 사람들 여럿 봤습니다. 한 평생 자신의 삶을 주를 위해 살겠다고 풀 타임 사역자로 헌신한 목회자들도 돈 때문에 무너질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또 이 문제에 걸려 넘어지겠습니까?
제가 늘 제 마음에 돈에 대한 욕심이 찾아올 때면, 찾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큰 소리로 읽고 또 읽어 제 마음에 새기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준 권면의 말씀입니다. “디모데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돈돈돈 해도 너 하나만큼은 그 길을 피해라! 오직 너 하나만은 그렇게 살지 말고 오직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라!” 디모데전서 6장 5-12절 말씀 함께 보겠습니다. “(딤전 6: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딤전 6:6)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딤전 6: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딤전 6: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딤전 6: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 6: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딤전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가르쳤습니다. “디모데야! 너가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잘 살려고 신앙생활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다. 디모데야, 부자가 되려는 자세로 기도하고, 말씀보는 자의 경건은 아무런 유익이 없단다. 그러나 너가 이미 가진 것에 만족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너의 경건은 큰 이익이 될 것이다. 디모데야, 부자가 되려고 하지 말아라.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생각하렴. 너가 부자가 되려고 한다면 너는 반드시 유혹으로 인해 믿음에서 떠나 ‘나는 왜 이리 가난할까?’하며 많은 근심을 하며 살게 될 것이다. 너는 그렇게 살지 말아라! 디모데야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냐? 이런 유혹들을 피하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라! 이를 위해 하나님이 너를 부르셨다. 너는 증인의 삶을 살아라!” 우리가 금전적인 이익을 바라보고 신앙생활 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돈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을 돌보는 일을 하는 사람이 그 일을 통해 물질적 이익을 볼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 역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맘몬을 섬기는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돈 때문에 무너집니다. 그리고 제발 부탁합니다. 복권 사지 마십시오. 복권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물질에 자족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 사람의 경건은 헛것입니다. 아무 유익도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권면했습니다. “여러분은 물질적 이익,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양들을 돌보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나님의 양 무리를 돌보십시오.” 사도 베드로가 말하는 ‘즐거운 뜻’이란 양들을 볼보는 일을 기쁜 마음, 열정을 가지고 하라는 것입니다. 양 무리를 기쁜 마음으로 돌보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목양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게 만들어주는 마음은 주님을 향한 풍성한 사랑입니다. 영혼을 돌보는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열정적으로 하게 만들어주는 것 역시 ‘주님을 향한 풍성한 사랑’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연애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이 “널 위해서라면 하늘에 있는 별도 달도 다 따줄 수 있다” 입니다. 물론 거짓말이죠.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만 할 수 있다면 어떠한 헌신도 기꺼이 열정적으로 치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먼 거리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값비싼 대가도 마다하지 않고 지불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영혼들을 열정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양육하게 만들어주는 우리 마음 속 원동력은 주님을 향한 우리들의 풍성한 사랑입니다. 내가 오늘 만나는 그 한 사람을 주님의 사랑으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세우는 일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에 주님을 위해서 그 사역을 즐거운 마음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영혼을 돌보고 양육하는 일을 하는데 아무런 물질적, 금전적 이익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 일을 기꺼이 감당할 것입니다. 또한 물질적, 금전적 손해를 봐야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에 기꺼이 그 사역을 감당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 된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즐거운 뜻으로 양 무리를 돌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성도를 섬기는 열정과 기쁨이 우리 코너스톤 교회 위에 머물기를 축복합니다.

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셋째로,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양 무리를 돌보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권면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벧전 5: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양 무리들을 지배하거나, 그 위에서 군림하려고 하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5절에 ‘주장하는 자세’라는 말은 ‘위에서 강제로 짓누르고 스스로 주인 노릇 한다’는 뜻입니다. 종종 교회에서 회사 사장이나 회장처럼 거들먹거리며 양들을 괴롭히는 미성숙한 지도자들을 보게 됩니다. 이들은 권력을 잡은 독재자처럼 양 무리 위에 군림하려고 합니다. 베드로는 교회의 지도자가 양 무리에 대하여 그와 같이 대하는 모습을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어린 자녀를 둔 어머니가 유치원생 아이를 데리고 미용실에 갔습니다. 어머니는 미용사에게 희망하는 머리 스타일을 주문합니다. “너무 짧게는 자르지 말아주세요.” 이발 시간이 다 끝나고 아이의 머리를 본 어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미용사가 아이의 머리를 짧게 잘라 놓았습니다. 아이도 새로운 머리 스타일이 어색하고 싫은 지 울음을 터트립니다. 어머니가 미용사에게 불만을 표합니다. “아니 왜 이렇게 짧게 자르셨어요?” “어머니, 요즘 강남에서는 어린 아이들 머리를 이렇게 짧게 자르는 게 유행이에요. 어머니께서 뭘 잘 모르시나 보네요. 이렇게 짧게 잘라야 유치원 가도 아이들에게 무시 안 당해요.” 아이 엄마 입장에서 보면, 자기 의견이 완전히 무시된 거죠. 기분 나빠서 다시는 그 미용실 안 갑니다.
이처럼 우리가 양들 위에 군림하여 주인 행세를 한다는 것은 양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완전히 무시해버리고, 내가 생각하는 좋은 방식대로 양을 다룬다는 것입니다. 요즘에도 회사 CEO처럼 성도들 위에서 군림하려는 목회자들을 종종 보곤 합니다. 종종 카리스마 있는 담임목사가 교회 재정으로 감당할 수 없는 더 큰 건물을 구입하려 하거나, 아니면 교회가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의 새롭게 교회 건물을 건축하려는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저는 교회 건물을 건축한다는 명목으로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믿음과 헌신이란 덕목을 내세우며 교회 성도들을 은행에서 보증 세우고, 성도들을 은행에서 빚지게 하는 것은 절대로 비성경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성도의 자발적이고 기쁜 헌신을 요구하지, 카리스마로 누른 강압적이고, 강제적인 헌신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보증 섰다가 지금도 빚에 허덕이고 있는 성도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목회자의 잘못된 욕심 때문에 양 무리가 죽어가는 거죠. 수많은 가정들이 지금도 교회 지도자들의 잘못된 결정 때문에 얼마나 눈물 흘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양들 위에 군림하려는 자는 삯꾼이며 거짓 목자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직 우리가 양 무리의 본보기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저를 한 번 따라해 보시겠습니까? “교회에서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목자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잘 따라가는 사람이다.” 목자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잘 따라가는 사람만이, 양 무리를 잘 인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양들 앞에서 거들먹거리신 적이 있으십니까? 주님은 섬기시고, 섬기시고, 또 섬기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기 바로 전에도 허리에 수건을 동이시고, 대야에 물을 떠다가 직접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기셨습니다. “(막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하고 말씀하신 주님은 그 말씀대로 섬기고, 섬기고, 또 섬기시고, 결국 자기 목숨까지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고 죽으셨습니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섬김의 발자취를 따라 섬기고, 섬기고, 또 섬기며 자신의 삶을 내어주는 그 사람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본을 보여주는 참된 목자입니다.

결론.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 무리를 올바른 태도와 자세로 섬기고 돌보는 목자들에게 훗날 놀라운 상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4절 말씀입니다. “(벧전 5: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여기서 말하는 목자장은 누구일까요? 바로 모든 영혼들을 사랑으로 돌보시고 인도하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가 나타나실 때는 곧 그가 이 세상에 재림하시는 날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 세상의 마지막 날입니다. 그 때가 되면 목자장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양을 다 찾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부득이함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양들을 돌본 목자들, 물질적인 이익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열정을 다해 양들을 돌본 목자들, 군림하는 자세가 아니라 섬김의 본이 된 목자들에게 ‘영광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베드로가 언급한 ‘면류관’은 물론 고대 올림픽 경기에서 우승자에게 황제가 직접 씌어주던 월계관을 의미합니다. 경기 우승자가 수만 명의 관중이 환호하는 가운데 황제로부터 ‘Champion’에게 주어지는 월계수로 만든 면류관을 받았습니다. 이 월계관은 한 달도 채 넘기지 못하고 결국 시들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의 양 무리를 위해 섬긴 목자들에게 주실 면류관은 영원히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사랑하는 코너스톤 교회 성도 여러분,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양 무리를 잘 돌봄으로 말미암아 우리 함께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 주실 이 면류관을 받는 목자들로 살아갑시다. 그러한 삶이야말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가장 기쁘시게 하며 우리 인생 최고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양 무리를 돌보는 참 목자로 살아가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