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29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누가복음 9장 37-50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제자와 함께 기도하기 위해 산에 올라가셨던 주님은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보자 마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맞이했습니다. 이 때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선생님, 내 아들을 보아주십시오. 그 아이는 내 외아들입니다. 귀신이 그 아이를 사로잡으면, 그 아이는 갑자기 소리를 지릅니다. 또 귀신은 아이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입에 거품을 물게 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상하게 하면서 좀처럼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청하였으나, 그들은 해내지를 못했습니다.” 독자가 귀신에 들렸으니,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마태복음의 기록을 보면 이 아들은 간질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따금씩 온 몸이 돌과 같이 경직된 채로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집니다. 동네 사람들이 아들이 저렇게 아픈 것은 부모 죄 때문이라고 얼마나 손가락질했을까요? 동네 아이들이 키득거리며 따돌리고 놀리지는 않았을까요? 아들이 이렇게 살아가야 하니 부모 마음이 억장이 무너지지 않았겠습니까?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살리려면 아버지가 못할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자존심도 체면도 다 버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소리를 질러가며 예수님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옆에서 듣고 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얼마나 얼굴이 빨갛게 변했을까요? 분명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와 병든 자를 고치는 능력을 주셨음에도 제자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41절입니다. “(눅 9:4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여기서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며 사용하신 ‘패역한 세대’라는 말은 구약시대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신과 불순종으로 반응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꾸짖으시며 사용하신 표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불신과 불순종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신 것처럼,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는 세대를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아버지에게 귀신 들린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예수님께 가까이 데리고 오자, 귀신은 아들이 예수님께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도록 아들을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했습니다. 42절에 사용된 ‘거꾸러뜨리다’라는 표현은 유도나 레슬링 경기 할 때 상대 선수를 바닥에 엎어 매치는 것과 같이 사람을 바닥에 집어 던지는 동작을 가리킵니다. 귀신이 얼마나 이 아들을 괴롭혀왔는지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게다가 또 다시 간질 증상을 일으켜서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그 아들 속에 있는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귀신은 떠나갔고, 아들은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회복된 아들을 다시 그의 아버지에게 돌려주셨습니다. 이 때 아버지의 감격을 한 번 머리 속으로 그려보십시오. 병원에서 죽어가는 아들의 수술을 성공적으로 집도한 의사 앞에서 90도로 연신 허리를 숙이며 “선생님 감사합니다!”하고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의 모습처럼, 이 아버지도 예수님 앞에서 얼마나 많은 인사를 드렸을까요? 말씀으로 귀신 들린 아들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보고 사람들은 놀라서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에 예수님은 두 번째로 수난 받으실 것을 미리 알리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깨닫지 못하게 감춰졌기 때문이며, 동시에 제자들 중에는 예수님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는 일에 대해서 두려워하여 감히 질문할 염두도 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고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자부심이 상당히 컷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의 탐욕을 이루고자 하는 바램이 저마다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제자 중에서 누가 더 큰 사람이고,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말다툼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은 수제자라고, 야고보와 요한은 자기들이 예수님께서 가장 아끼시는 제자라고, 또 다른 제자들도 저마다의 이유를 들며 서로 자신이 가장 큰 제자라고 주장했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다투는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이제 조금 있으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왕의 자리에 오르실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열 두 제자가 그 나라의 개국 공신들이 될 것인데, 예수님 곁에서 국무총리, 국무장관 등 요직을 누가 차지하게 될 지 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누가 더 서열이 높은 제자냐 하는 문제였으나, 실상은 이것을 빌미로 자신의 탐욕을 이루고자 하는 제자들의 지위와 명예에 대한 더러운 욕심을 보여줍니다.
이미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이런 변론이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주님 옆에 세우셨습니다. 오늘날에야 어린이들에 대한 인권이 잘 보장 되어 있는 사회입니다만, 이 당시 어린 아이는 사람을 계수할 때 인원수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인간대접을 못 받았습니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예수님은 이와 같은 사회적 약자, 힘 없고, 연약한 자들을 섬기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낮은 위치에 있는 이웃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섬기는 것이 곧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요한은 예수님의 공식 열 두 제자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빌어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이와 같은 요한의 모습은 그가 얼마나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그리고 사람들과 비교하여 큰 자의 위치에 서고 싶어했는지 보여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 같은 일을 금지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을 믿고 그 이름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자들도 같은 편에 속한 동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높아지려는 야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가 더 높아지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까? 남들 위에 군림하는 지위와 남들이 알아주는 명예를 좇기 위해서 예수를 따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삶을 살아가려 하는 자들은 오히려 낮아질 뿐입니다. 예수님은 높아지려는 야망을 버리고 낮은 자를 섬기는 자야 말로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높은 자가 되고, 유명한 자가 되고, 힘 있는 자가 되려는 야망을 버리는 것이 제자의 도리입니다. 우리들은 나 자신의 탐심을 위해 살아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갑니다. 그러하기 위해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 한 영혼 한 영혼 예수의 이름으로 섬기며 살아감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큰 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