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18 깨달은 마음으로 전하는 말의 가치 (고린도전서 14장 13-19절)

(고전 14: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고전 14: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고전 14:15)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고전 14: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고전 14:17)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고전 14: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전 14: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방언’을 최고의 은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방언이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측면에서 개인적인 면에서는 분명 유익하지만,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이기에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한계점을 지적 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방언의 은사가 전혀 필요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방언 말하는 자는 자신의 방언을 통역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13-14절 말씀을 봅시다. “(고전 14: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고전 14: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영은 내면에서 하나님과 소통하지만, 사실 이성적으로 자신의 기도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통역의 은사를 함께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구하라고 권면 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이 하는 방언의 기도가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채, 공예배 중에도 자랑하듯이 방언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하는 기도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로는 교회에 덕이 될 수 없음을 말했습니다.
이어서 15절 말씀을 봅시다. “(고전 14:15)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영으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함께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했습니다. 여기서 ‘영으로 기도한다’는 말은 방언으로 기도함을 말하는 것이고, ‘마음으로 기도한다’는 말은 자신이 지금 하나님께 어떤 내용으로 기도하는지 깨닫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영으로만 기도할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기도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를 것을 권면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영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동시에 그의 마음도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즉 방언과 통역의 은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영과 마음이 모두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찬송하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방언만 할 줄 알고, 통역의 은사가 없다면 지금 내가 어떤 말을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자신은 방언으로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다고 주장하고 축복하는 기도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할지라도 기도하고 있는 내용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으니 옆에서 방언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이해할 수 없는 기도를 듣고 어찌 하나님께 감사하고, 어찌 “아멘!”하고 대답하겠습니까? 16절을 봅시다. “(고전 14: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이와 같이 바울은 이해할 수 없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개인의 영으로는 유익이 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방언은 통역의 은사 없이는 공동체에 유익이 되지 못함을 지적함으로써, 바울은 다른 성도들을 배려하지 않고 공적 예배에서 방언을 무질서하게 사용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17절에 바울은 방언이 통역 없이는 개인의 영에만 유익하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고전 14:17)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바울은 지금, “여러분은 방언기도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는지 모르겠으나, 여러분의 기도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영적인 유익도 끼치지 못했습니다.”하고 말한 것이죠.
바울도 방언의 은사를 하는 사람 입니다. 18절에 심지어 그는 고린도교회 모든 성도들보다 자신이 방언을 더 잘 한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신이 이와 같이 방언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자격과 권위가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죠. 바울은 자신이 이와 같은 뛰어난 방언의 은사를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자신은 방언으로 성도들을 대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일상적인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자신이 깨달은 은혜들을 전달하였음을 말했습니다. 19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고전 14: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바울은 자신이 교회에서 성도들을 향하여 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일만 마디 하는 것보다 차라리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다섯 마디 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로 인해 우쭐해하거나 교만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받은 은사를 통해 성도들에게 유익을 끼치고, 교회의 덕을 세울 것을 권면합니다. 특별히 방언의 은사만을 강조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은 그들이 영으로만 기도할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함께 기도할 수 있도록 통역의 은사를 구할 것을 권면 했습니다. 바울은 다른 성도들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하는 방언 천마디 보다, 교회에 덕을 세울 수 있는 깊은 깨달음이 있는 다섯 마디가 더 낫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들은 어떻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우리 기도의 자세 가운데 변화되어야 하는 부분은 없습니까? 중언부언 오랫동안 기도하는 것보다, 짧은 시간 기도해도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이와 깉이 우리의 마음을 담은 진실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