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06] (전체예배영상) 요나서 시리즈 (4) 하나님의 아끼는 사랑 (요나 4장 1-11절)

(욘 4:1)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욘 4: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욘 4:3)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욘 4: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욘 4:5)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욘 4: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욘 4:7)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욘 4: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욘 4: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
(욘 4: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욘 4: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1. 니느웨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
니느웨에 도착한 요나는 하루 동안 도시를 돌아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도시에 가득한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40일 후에 니느웨를 멸망시키실 것이란 메시지였습니다. 이와 같이 요나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자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놀라운 일이 나타났습니다.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도 없이 살아왔던 니느웨 사람들이 그들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며 금식을 선포한 것입니다. 심지어 니느웨의 왕도 회개의 행렬에 동참했습니다. 니느웨의 왕은 화려한 왕복을 벗고, 회개의 의미로 까칠한 베옷을 입고 재를 뿌리며 온 도시가 회개에 동참할 것을 명령 했습니다. 작은 불씨 하나가 바람을 타고 산 전체를 태우는 커다란 화마로 번져가듯이 회개의 불씨는 니느웨 도시 전체로 이어졌습니다.
이와 같이 니느웨 사람들이 진심으로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자, 하나님은 40일 뒤에 성읍을 멸망시키려 했던 원래의 계획을 돌이키고 취소하셨습니다. 우상을 섬기며 살아가던 이방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 이 사건은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이야기 입니까? 분명 듣는 이마다 하나님께 기뻐하며 찬송을 부르고 감사를 드릴만한 엄청난 사건 입니다.

(1) 회개하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오늘 본문 속 요나의 표정은 달랐습니다. 그는 이 사건을 보며 크게 분노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그의 온몸이 붉게 달아올랐고, 열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모두가 기뻐할 만한 이 일에 대하여 요나는 어떠한 이유로 이렇게 크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요나가 이스라엘의 원수인 니느웨가 멸망하기를 진심으로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 입니다.
처음부터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쳤던 이유도, 니느웨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도시 멸망 계획’을 돌이켜 취소하실 것을 선지자 요나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 입니다. 내심 니느웨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하기를 바라고 있었던 요나는 크게 노하며 하나님께 불평하기 시작 했습니다. 요나서 4장 1-2절 말씀 입니다. “(욘 4:1)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욘 4: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1절에 ‘노하다’라는 표현은 ‘뜨겁다’, “타다’란 뜻을 가진 단어로 하나님을 향한 요나의 분노가 온몸을 태울 정도로 극에 달했음을 보여줍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멸망시킬 뜻을 돌이키시고 심판을 거두신 일에 대하여 못마땅해 하며 잔뜩 화를 냈습니다. “하나님! 제가 고국 이스라엘 땅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분명 이와 같이 니느웨를 용서하시고 심판하시려는 뜻을 돌이키실 것이라고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서둘러 다시스로 도망치려고 했던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줄 알았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자비로우신 분이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사랑이 한 없이 크신 분이신 줄을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되도록 뜻을 돌이키시어 재앙을 내리지 않으려 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선지자 요나는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시며 사랑이 많으신 분임을 익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분명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해 주실 줄로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모습을 보기 싫어서 다시스로 도망쳤던 것이죠. 그러나 결국 깊은 바다에 빠져 물고기 뱃속에 갇혔던 요나는 하나님을 피해 도망친 일을 회개하며 니느웨로 갔던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원수 니느웨가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나는 모습을 보고 요나는 큰 화를 내고 있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니느웨가 멸망하기를 바라고 또 원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요나가 아무리 보아도 니느웨는 도저히 용서 받지 못할 악인들이었습니다. 실제로 역사를 살펴보면 니느웨 사람들은 매우 잔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타 민족과 전쟁 시 칼로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어린 아이들의 목을 뱄습니다. 도시에는 폭력과 간음이 넘쳐났고, 거리에는 거짓과 살인이 가득 했습니다. 따라서 요나가 볼 때 니느웨 사람들은 용서 받을 만한 자격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께 심판 받고 멸망하여 바람에 날려가는 먼지처럼 이 지구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려야 마땅한 죄인들이었습니다. 요나는 분명 의심없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을 용서하셨으니, 요나가 화가 잔뜩 나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 요나 조차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 여긴 극악무도한 악인들도, 우리 하나님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용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 오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에스겔서 18장 23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겔 18:2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죄인을 심판하시는 것을 즐겨하시는 분으로 오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 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죄 가운데 죽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인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 악한 길을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사악한 죄를 지은 사람일찌라도 주님께 돌아오면 그 사람을 용서해 주십니다. 이사야서 55장 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 55:7)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혹시 오늘 이 자리에 자기 자신은 도무지 용서받지 못할 극악무도한 죄를 지은 죄인이기에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분이 계시진 않습니까?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품어주지 못할 죄인은 없습니다. 2절에 나오는 요나의 고백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우리가 믿고 섬기는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에게 의지하고 나온 모든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들의 죄를 다 용서해 주시고, 그들의 허물을 다 덮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죄를 가지고 나아오십시오. 자비로우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은 모든 더러운 죄를 다 용서해 주실 것 입니다.

(2) 자격이 있어야 사랑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요나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기로 뜻을 돌이키셨음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끝까지 이 성읍이 멸망하는 모습을 보고자 했습니다. 요나서 4장 5절 말씀 입니다. “(욘 4:5)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요나는 니느웨에서의 사명을 다 마친 후에도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 성읍이 멸망하는 모습을 보고자 니느웨 성읍 동쪽에 초막을 치고 앉아 기다렸습니다. “저 나쁜 니느웨 놈들. 이대로 끝나진 않을거야. 분명 곧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지 저 도시가 곧 무너내려 앉겠지.”하는 심정으로 선지자 요나는 이를 갈며 니느웨의 멸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를 가진 미움이 얼마나 컸는지 볼 수 있는 대목 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당시 요나가 사역했던 북이스라엘 역시 니느웨와 마찬가지로 매우 심각한 영적 타락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산과 도시마다 돌과 나무와 금속으로 만든 우상이 넘쳐났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버린 채 해와 달과 별을 섬기고 절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에게 제사를 드리는 백성들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성적인 범죄는 이미 사사시대부터 동성애가 나타나고 있었으며, 사회적으로는 빈부격차가 날이 갈수록 심해져 동족을 노예 삼고, 과부, 고아, 가난한 자와 같이 사회적 약자들은 버림 받은 상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버린 것이죠. 무늬만 하나님의 백성이지 이스라엘도 니느웨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니느웨는 용서 받을 자격이 없고, 오직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민족이고, 앗수르는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줘서는 안되는 민족이라고 자기 나름대로 구분 짓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요나는 자기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께 사랑 받을 수 있는 대상과 사랑 받을 수 없는 대상을 구분하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사람인지 자신의 기준으로 정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요나가 볼 때 이스라엘은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어도 여전히 용서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으나, 니느웨 사람들은 도무지 용서 받지 못할 죄인이었습니다. 따라서 요나는 자신의 기준에서 볼 때 분명히 버림받아야 마땅한 니느웨를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에 하나님께 몹시 화가 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3) 인간의 교만함이 가지고 온 비극
요나는 지금 이 상황이 매우 불의하고 부당하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크게 화를 내며 하나님께 불평을 토로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요나가 도대체 무엇이 그리 억울해서 이렇게 하나님께 ‘죽고 싶다’고, ‘죽여 달라’고 생떼를 쓰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진심으로 죄를 뉘우친 죄인들을 용서해 주신 일이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니느웨에 사는 저 많은 악인들이 용서 받는다고 해서 요나가 어떤 직접적인 피해를 보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니느웨에 사는 수많은 악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기에, 하나님께서 불가능한 기적을 일으키셨다고 뛸 듯 기뻐하고 찬송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그저 자신이 미워했던 니느웨 사람들이 죄사함 받고 용서 받았다는 사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요나처럼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고,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태도와 자세가 바로 ‘영적 교만’ 입니다. 요나는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께 사랑 받고 죄를 용서 받을 사람의 기준과 자격을 정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정해 놓은 기준과 자격에 맞지 않는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께 용서 받는 것을 보자 몹시 흥분하고 화를 내며 “하나님 이렇게 하시는 것은 정의롭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들은 죽어 마땅한 악인들입니다!”하고 불만을 토로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 안에 있는 ‘교만’은 그로 하여금 ‘자신은 옳고 하나님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무서운 독소 입니다. 그래서 교만은 사람의 영혼을 죽입니다. 혹시 우리들도 요나처럼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이 잘못했다고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이건 아니죠. 이건 분명 하나님이 잘못하고 계신 거죠! 왜 제가 이런 부당한 대우를 당해야 합니까? 왜 하나님 저 사람은 저렇게 잘해주고, 나는 왜 이렇게 대접하세요? 왜 예수 안 믿는 제 친구는 저렇게 세상에서 잘 나가게 하시고, 예수 믿는 저는 이 모양 이 꼴 입니까? 하나님 이건 아니죠.” 혹시 현재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하여 하나님을 향한 불만과 원망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보다 내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가르치려고 하는 교만함이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요나는 하나님의 방식이 틀렸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옳다고 화를 냈던 것입니다.
요나와 같이 마음에 교만이 자리잡은 사람들은 타인이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있는 것을 보면 화를 냅니다. “넌 그것을 가질 자격이 없어! 그것은 사실 내가 가지고 누려야 하는 것들이야!”, “하나님은 불공평 해! 왜 저 사람이 저와 같은 것을 누리게 하시고, 나는 안 주시지? 내가 볼 때는 내가 오히려 더 자격이 있는데?” 이게 바로 교만 입니다.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고, 저 사람은 사랑 받을 자격이 없다. 그래서 나는 저 사람보다 더 잘 살아야 한다. 내가 저 사람보다 더 많이 갖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저 사람이 나보다 잘 나가거나, 나보다 더 많은 물질을 갖거나, 나보다 더 좋은 무언가를 갖는 것은 옳지 않다”고 은연중 생각하는 그 마음. 다른 사람이 잘되거나 좋은 처지에 있는 것 따위를 공연히 미워하고 깎아내리려 는 마음. 이 질투심의 뿌리가 바로 교만 입니다. “나는 남보다 더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질투는 교만에서 시작 됩니다.
TV에 나오는 유명 여자 연예인들이 수천 불짜리 명품 옷 입고, 수만 불짜리 명품 가방 매고 다니면 부럽고 동경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내 고등학교 동창 친구가 SNS에 명품 옷 입고, 명품 가방 매고 사진 찍어 올리면 그 때부터 배가 아픈 거에요. 내가 내심 경쟁상대로 여겼던 사람이 나보다 더 잘 나가면 질투심이 발동하는 거죠. ‘그래도 내가 쟤 보다는 나아. 그래도 내가 쟤 보다는 괜찮지’하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나보다 무언가 나은 상황에 이르면, 마치 ‘내가 누려야 했던 어떤 좋은 것을 빼앗긴 것처럼 느껴지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란 속담이 있습니다. 왜 배가 아플까요? 사실 세상에 땅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TV에 나오는 미국 부자들이 미국에서 제일가는 집에서 산다는 소식을 들으면 선망의 대상은 될지 몰라도 그 사실 때문에 밤에 잠 못 들거나 하진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하고 가까운 사촌이나 친구가 나보다 큰 집을 샀다는 소식을 들으면 질투심이 발동하는 거에요. 내가 내심 경쟁상대로 여겼던 사람이 땅을 샀다는 소식에 질투심이 생기는 거죠. 질투심의 뿌리는 교만 입니다. 저를 한 번 따라해 봅시다. “질투는 영혼의 종기이며, 교만은 영혼의 암덩어리다.” 질투라는 종기 우리 영혼에서 반드시 제거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우리 영혼이 썩어갑니다. 교만이란 암덩어리도 우리 영혼에서 뿌리 뽑아야 합니다. 안 그러면 우리 영혼이 죽습니다.
요나가 하나님꼐서 니느웨를 용서하신 일에 대해서 화를 냈던 이유는 저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너희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사는 저 죄인들을 용서해주는 것은 잘못된 일이야!” 이처럼 인간 안에 자리잡은 교만은 상대방이 하나님께 축복 받는 것을 보고도 함께 기뻐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비극을 가져다 줍니다.
사촌이 땅을 사도 그것이 내 일인 것처럼 진심으로 함께 축하해 줄 수 있는 사람, 내 친구나 직장동료 혹 나의 경쟁상대가 나보다 더 일이 잘 풀리고 성공하고 잘 살아도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는 사람, 또한 내 친구나 동료의 상실이나 아픔을 보고 속으로 고소해 하지 않고 진심으로 함께 슬퍼해줄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와 같이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로마서 12장 1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롬 12: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만일 오늘 본문에서 요나가 죄사함 받고 용서받은 니느웨를 보고 진심으로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했다면, 니느웨 백성들을 축복하며 함께 축하해주었다면 오늘 이 본문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웠을까요? 한 영혼도 품어 주지 못하는 ‘간장 종지’ 같이 작은 마음은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 모든 코너스톤교회 성도님들의 마음만큼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드넓은 산’과 같은 마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박 넝쿨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심

(1) 이 세상의 모든 영혼들을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
이와 같이 이스라엘만 하나님의 사랑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교만함이 가득했던 요나에게 하나님은 참 사랑이 어떤 것인지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요나를 위해 박 넝쿨 하나를 준비하셨습니다. 6-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욘 4: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욘 4:7)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하나님은 그 박 넝쿨이 요나가 지은 초막 위로 자라나게 하셨고, 박 넝쿨은 요나의 머리 위에 시원한 그늘이 지게 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요나는 뜨겁게 내리쬐는 땡볕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그는 박 넝쿨 때문에 몹시 기뻤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새벽 무렵 하나님께서는 벌레로 하여금 박 넝쿨을 모조리 갉아먹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초막 위에 자리 잡은 박 넝쿨은 그만 시들어 죽어버렸고, 요나 머리에 위에 자리잡았던 시원한 그늘도 다 사라졌습니다. 이에 얼마 후 날이 밝아오고 햇볕이 내리 쬐고 뜨거운 동풍까지 불어 일자, 더운 날씨에 그만 요나는 기력이 다 빠졌습니다. 이에 그는 또 다시 죽고 싶은 심정으로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주여, 내가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시원한 그늘을 제공했던 박 넝쿨을 하룻밤 사이에 시들게 하신 것에 대하여 불만을 표출했습니다. “하나님 박 넝쿨이 있어서 뜨거운 햇볕도 가려주고 좋았는데, 왜 벌레가 그걸 먹게 하셔서 다 시들게 하셨어요?” 요나는 박 넝쿨이 시든 것을 보고 매우 아쉬워하며 하나님을 원망하 듯 말했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은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0-11절 입니다. “(욘 4: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욘 4: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요나야, 보다시피 너는 네 스스로 수고도 하지 않았고, 네가 키우지도 않았으며, 다만 하룻밤 사이에 생겨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버린 저 박 넝쿨 한 포기조차도 그토록 아끼고 아까워하는구나? 그러니 너는 생각해 보라.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 곧 옳고 그름을 구별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무려 12만 명이나 있고, 또한 가축들도 수없이 많이 있는 이 큰 성읍 니느웨를 내가 아끼고 아까워하는 것이 어찌 옳지 않으냐?” 하룻밤 사이에 피었다 사라진 박 넝쿨을 아끼는 요나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그가 직접 심지도 않고, 땀 한 번 흘린 적 없고, 수고한 적도 없는 저 박 넝쿨이 벌레에 씹혀 말라 죽어가는 것을 보고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매일, 매순간 돌보고 계시는 12만명이 넘는 저 많은 사람들과 많은 숫자의 가축들이 살고 있는 니느웨 성읍이 멸망당한다면 하나님 마음은 얼마나 아프겠는가를 생각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한 영혼 한 영혼 돌보고 계십니다. 요나가 볼 때 니느웨는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 없는 버림 받은 민족이었으나, 실상 니느웨도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이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요나서의 마지막 구절인 4장 11절은 하나님의 질문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요나서를 읽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물어보고 계신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 소중하지 않은 영혼이 있을까요? 하나님은 악인일지라도 돌보고 계시며, 그들이 언제라도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주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허물을 용서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통해 요나에게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사랑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돌보시고 계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그 가운데 죄인들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혹시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진 않습니까? 다시 주님께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 우리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들을 주님의 한 없이 넓은 품으로 받아주시고 안아 주실 것입니다. 새로운 한 주 이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코너스톤교회 가족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