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07 레위인의 첩과 베냐민 전쟁 (사사기 19장-21장)

정치, 경제, 문화 등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부분이 흔들리고 타락한다 해도, 신앙이 그 중심을 잡아준다면 얼마든지 그 사회는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영역마저 타락해 버린다면 그 사회는 회복의 소망이 없습니다. 사사 시대 이스라엘이 바로 그런 영적 파탄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과연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이스라엘의 신앙을 담당해야 하는 레위인들이 타락했던 것이죠.
그런데 사실 순서를 바꾸어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정치, 경제, 문화의 영역에서 영적 타락이 먼저 진행되고 이후에 신앙의 영역이 타락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먼저 신앙의 영역이 타락하다 보니 이스라엘 사회 전체가 영적 타락을 겪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신앙을 버리자, 이스라엘 사회와 민족 전체가 모든 영역에서 영적으로 타락하는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고발하기 위해 사사기 저자는 사사기에 두 개의 ‘에필로그’를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이 에필로그는 모두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을 책임지는 레위인들의 타락상을 다루고 있는 이야기 입니다.
레위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 입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 인도자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명을 가진 학자 및 교사 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판단하는 재판관이며, 율법을 어긴 부정한 자들을 합당하게 처벌하는 법 집행자 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데 있어 중대한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레위인들 입니다. 그런데 사사기를 보면 바로 이 레위인들이 타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지난 주에 첫 번째 에필로그를 통해 한 명의 레위인을 만났습니다. 그는 그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 모세의 손자였으며, 게르손의 아들인 레위인 ‘요나단’이었습니다.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레위 자손의 사명을 저버렸고, 오직 자신의 눈 앞에 있는 더 큰 명예와 이익을 위해서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기로 선택했습니다. 사사기의 저자는 모세의 손자 요나단의 모습을 통해 당시 하나님의 뜻이나 말씀보다, 돈과 명예를 중요시 하는 물질주의에 빠져 있는 레위인을 고발 했습니다.
이어서 사사기의 두 번째 에필로그인 오늘 본문은 레위인의 성적 타락상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에 등장하는 레위인은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는 오늘 이야기가 단 한 사람의 레위인 이야기가 아니라, 이 당시 모든 레위인의 전반적인 실태를 고발하기 위해 쓰여진 이야기임을 암시해 줍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레위인은 에브라임 산지에 살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에필로그는 이 레위인의 첩이 그의 남편을 떠나 도망치는 장면으로 시작 됩니다. 레위인이 ‘첩’을 데리고 있었다는 것부터가 부정적인 시대상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첩이 남편인 레위인을 버리고 도망간 이유도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사사기 19장 2절을 보니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음’이란 ‘바람이 났다’는 차원이 아니라 창녀처럼 ‘몸을 팔았다’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단어 ‘자나’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첩을 둔 레위인, 행음하여 남편을 버리고 도망친 아내… 이러한 장면들은 모두 사사 시대의 성적 타락상을 보여줍니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살아갈 것을 가르치는 교사요, 말씀의 재판관이요, 법 집행관인 레위인의 가정이 성적으로 행음하고 있는 것이죠. 레위인은 첩을 데리고 오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길을 떠나게 됩니다. 그는 그곳에서 몇일 간 첩의 가족과 함께 머물다 다시 그가 살고 있던 에브라임 산지로 돌아가게 됩니다.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까지는 반나절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 입니다. 오전에 일찍 출발하면 늦어도 정오 전에는 도착할 수 있는 거리 입니다. 그러나 첩의 아버지가 레위인을 좀 더 머물라고 권유하고 지체하는 바람에 레위인 일행은 이른 오전이 아닌 늦은 오후에 길을 나서게 됩니다. 이 때 레위인 일행은 ‘여부스’란 도시 앞을 지나가게 됩니다. 여부스는 ‘여부스 족속’이 살고 있던 땅을 가리킵니다. 여부스 족속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복해야 하는 가나안 족속 중 하나 였으나, 그들의 철기 무기가 무섭고 성읍이 정복하기 어려운 지형에 위치하여 있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부스 족속을 상대하지 못하고 그대로 지금까지 방치 해두었던 것입니다. 사시기 저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멸하라고 명령하신 가나안 족속인 여부스 족속이 아직 남아 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사사 시대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가나안 땅을 정복할 마음이 없는 시대였음을 보여줍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느 정도 땅을 얻게 되자, 현실에 안주하고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여부스는 나중에 다윗이 왕이 되고 나서야 정복하게 됩니다. 이 곳이 바로 그 유명한 다윗의 성 예루살렘 입니다.
사사 시대에는 여전히 가나안 족속인 여부스 족속이 거주하는 땅이었기에 레위인 일행은 이 땅에 들어가지 않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에 들어가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베냐민 사람들이 정복한 땅 ‘기브아’에서 밤을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오늘 본문은 레위인 일행이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여부스’가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하고 있는 ‘기브아’가 안전한 것으로 믿고 기브아에 들어가는 장면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사사기 저자는 오히려 이러한 레위인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며, 이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족속과 다를 바 없는, 오히려 더욱 악한 범죄 행위를 일삼고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해가 저물고 어두워질 무렵 레위인이 기브아 성에 들어갔을 때, 아무도 그를 환영해 주지 않았습니다. 본래 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행객들이 성읍에 찾아오면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하룻밤을 재워주는 것이 당연한 의무로 여겨졌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한 후 광야에서 나그네 신분으로 살아가던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께서 나그네를 돌보라고 하신 말씀을 순종하는 문화에서 비롯된 사회적 의무였습니다. 그러나 기브아 성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아무도 레위인과 그의 일행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브아는 이미 사회적 윤리와 미덕조차 무너져버린 각박하고 몰인정한 도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때 한 노인이 등장하여 레위인 일행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는 실상 기브아 사람이 아니라, 에브라임 사람이었습니다. 즉 이 노인 역시 외부인으로써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자신의 기업을 떠나 타지파의 땅에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 학자들은 노인은 자신의 밭에서 일하고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남의 밭에서 일을 해주고 돌아오는 길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그네의 마음은 나그네가 가장 잘 아는 법입니다. 노인의 초청에 응하여 레위인 일행은 그의 집에서 머물게 됩니다.
그 날 밤 노인과 레위인이 마음 편안하게 저녁 시간을 즐기고 있을 때, 기브아 성읍의 불량배들이 이 집을 찾아왔습니다. 불량배들은 온 집을 에워싸 아무도 도망치지 못하게 만든 후, 노인에게 레위인을 자신들에게 넘겨달라고 말했습니다. 사사기 19장 22절을 봅시다. “(삿 19:22)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비류들이 그 집을 에워 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를 상관하리라” 여기 22절 마지막에 사용된 ‘우리가 그를 상관하리라’는 말은 ‘성관계하다’는 말 입니다. 즉 기브아 불량배들은 남자인 레위인을 성적으로 욕보이는 동성애를 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충격적인 장면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그 앞서 멸망당한 가나안 족속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불로 심판하신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사사기를 읽으며 우리는 이 대목을 통해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이 얼마나 심각한 단계에까지 이르렀는지 보게 됩니다. 사사기가 보여주는 성적 타락의 실상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인상이 찌푸려지는 장면 중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인은 레위인을 달라 요구하는 불량배들을 향하여 자신의 처녀 딸과 레위인의 첩을 대신해서 주겠다고 협상을 시도 합니다. 노인은 레위인만은 건들지 말라고 부탁한 것이죠. 이 때 노인이 한 말을 들어봅시다. “(삿 19:24)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 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어찌하든지 임의로 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치 말라 하나” 여기서 노인이 불량배들을 향하여 ‘어찌하든지 임의로 하되’라고 한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당신들이 눈에 좋은 대로 하시오!”라는 뜻 입니다. 사사기 저자는 바로 이러한 삶의 태도야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은 가장 커다란 죄라는 것을 우리에게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불량배들은 노인의 제안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레위인을 달라고 위협했습니다. 그러자 레위인은 자신의 첩을 잡아 밖으로 끌어내어 불량배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25절을 보면,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무리에게로 붙들어내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는 레위인이 집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 자신의 첩을 꽉 붙잡아서 강제로 끌어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몇일 전 직접 첩의 친정집으로 가서 그를 데리고 왔던 남편인 레위인이,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손으로 그의 첩을 불량배들에게 넘겨주었던 것입니다. 결국 집 밖으로 끌려나간 레위인의 첩은 기브아 불량배들에게 밤새도록 끔찍한 성폭력을 당하게 됩니다. 사사기의 저자는 이 여인의 죽음을 안타깝게 그리고 있습니다. 새벽 미명에 그녀는 불량배들에게 간신히 풀려나 남편이 머물고 있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녀는 문 앞에서 쓰러졌고, 문지방 위에 얹혀 있던 그녀의 두 손은 그녀가 얼마나 불량배들로부터 도망치기를 간절히 원했는지 보여줍니다. 레위인은 다음날 일어나서 자신의 첩이 지난 밤 사건으로 죽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단 하나의 사건을 보고 있습니다만, 사사기 저자가 이 한 가지 사건을 통해서 당시 이스라엘 사회 전반적인 영적 타락을 보여주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은 그들보다 앞서 죄를 지어 하나님께 심판 당했던 가나안 족속이나,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 보실 때 더럽고 사악한 죄를 짓고 사는 민족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성경 속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을 보십시오.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났던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가 미국 입니다. 대통령 취임식 때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선서하는 것이 전통인 나라 입니다. 미국에는 ‘국가를 위해 기도하는 날’도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분명 기독교 국가 입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을 보십시오. 동성애의 물결이 나라 전체를 가득 채웠습니다. 현재 미국에서 하루 동안 낙태로 인해 죽는 아기들의 숫자가 약 2,900명이나 됩니다. 성적 인신매매가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고, 마약과 살인, 사기와 강도가 매일매일 이 땅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국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기브아 땅과 같지 않습니까? 우리는 미국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진노 가운데 긍휼을 베풀어 달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은 어떻습니까? 한국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은 성매매가 전 세계 6 위 입니다. 한국의 수치스런 별명이 ‘성매매 공화국’이란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한국 사회에서는 남성들이 성매매 하는 것을 정상으로 보는 비율이 상당히 높게 나왔습니다. 한국 거리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동성애를 옹호하기 위한 행진과 축제를 벌였고, 이에 뒤질세라 부모 세대들도 가세했습니다. 이제 한국에서 동성애를 반대하면, 구식 사고를 가진 꼰대 취급을 당하거나, 사람을 차별하는 미성숙한 시민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한국이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기브아의 모습과 유사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계속해서 한국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한국을 향한 진노 가운데 크신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또 다른 사사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깨어서 기도하십시오. 세상의 주류를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십시오. 세상 모두가 “Yes”해도, 하나님 말씀에 위배 된다면 끝까지 “No”를 외칠 수 있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죽은 첩의 시체를 집으로 가지고 온 레위인은 또 한번 경악할만한 일을 벌입니다. 그는 첩의 시체를 토막 내었습니다. 아무리 죽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는 분명 반인륜적 범죄 입니다. 레위인은 토막 낸 첩의 시체를 이스라엘 지파 전체에게 보냈습니다. 이는 당시 군대의 소집을 위해서 짐승의 사체를 나누어 보내는 고대 근동의 풍습에서 나왔습니다. “군대 소집에 응하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이 짐승의 사체와 같이 될 것이다.”라는 메시지 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짐승의 사체가 아닌, 사람의 토막 난 시체를 받았으니 크게 놀랐을 것입니다. 결국 이 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모이게 되고, 이스라엘 전체와 베냐민 지파가 서로 싸우는 전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한 레위인 가정의 영적 타락이 이와 같이 이스라엘 전체를 동족상잔의 전쟁으로까지 번지게 된 것입니다. 레위인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신의 첩의 시신을 토막 내는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일을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고 죽이게 끔 만들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나머지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싸움으로 양쪽의 사망자의 숫자만 약 6만 5천명이 죽게 됩니다. 칼과 창을 들고 싸우며, 여기저기 화살이 날라오는 전쟁에서 부상 당한 사람들의 숫자까지 합치면 최소 이스라엘 군인 10만명 이상 이 전쟁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게 된 것 입니다. 게다가 이 전쟁의 결과로 베냐민 지파는 남자 600명만을 제외하고 노인, 여자들, 아이들 모두 전멸하게 됩니다. 한 지파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한 엄청난 동족상잔의 살육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엄청난 비극이 바로 사사기의 마지막 에피소드 입니다.
사사기의 저자는 사사기의 마지막 에피소드를 마무리하며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다음과 같이 진단 내렸습니다.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여기서 말하는 ‘왕’이란 표면적으로는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는 인간 왕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왕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각각 자신의 눈에 좋아 보이는 대로 살아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 보다, 자신의 탐심을 이루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삶을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영적 암흑기라 할 수 있는 사사 시대를 맞게 되었고, 마지막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동족끼리 서로 칼을 들고 죽이는 모습으로 끝이 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의 왕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의 욕심을 좇아 살아갈 때,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고통과 아픔이 찾아오게 됩니다. 우리들이 사사기에 나오는 레위인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전념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도 영적 타락으로 끝이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인생에 진정한 왕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까? 아니면 나 자신입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기준을 어디서 정하고 있습니까? 주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 입니까? 아니면 내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이루기 위한 삶 입니까?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의 소견대로 살아갔기 때문 입니다. 본문 속 레위인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자신의 정욕과 탐심을 위해 살아가는 삶은 비극 밖에 남지 않습니다. 우리는 또 하나의 영적 사사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세상 많은 사람들이 주를 버리고 자기 소견에 좋아 보이는 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습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왕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왕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 복된 삶을 살 줄 믿습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