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27 죽은 자의 부활과 주의 날 (살전 4장 13절 – 5장 11절)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궁극적인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심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직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는데,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들 성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복음을 전파한다는 이유로 박해와 핍박을 당해 사형에 처한 순교자들이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 전 죽은 자들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재림 전 죽은 자들의 경우,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부활합니다. 그리고 그들도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 전 죽은 자들에게는 소망이 없다고 오해하여 슬퍼했던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부활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13-14절을 봅시다. “(살전 4:13, 개정)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살전 4:14, 개정)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죽은 자들에게는 아무 소망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세상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것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믿고 죽은 성도들도 하나님께서 부활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보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재림 전 죽은 성도들이 부활하여 공중으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될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 재림 때 나타날 사건에 대하여 자세히 한 번 살펴봅시다. 16절을 봅시다. “(살전 4:16, 개정)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호령’이라는 것은 주인이 호령하는 소리 즉, 사람들을 부르는 소리입니다. 전쟁에서 장군이 그의 대군을 부르는 소리도 호령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 호령이 있습니다. 또한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하늘에서 나타납니다. 그와 함께 예수님께서 강림하십니다. 그 때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납니다. 즉 성도들이 부활합니다. 그 다음 17절을 봅시다. “(살전 4:17, 개정)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 후에 예수님 재림 때까지 살아 남은 자들도 부활한 자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성도들이 공중에 올라가는 이 사건을 ‘휴거’라고 부릅니다. 휴거는 예수님 재림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재림 전에 죽은 자들도 부활하여 함께 참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그때까지 살아 있는 자들만 예수님을 맞이하러 공중에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도 부활하여 함께 예수님을 맞이하러 갑니다. 예수를 믿은 자는 산자나 죽은 자나 모두 함께 공중에 들어올려져 예수님을 맞이하러 갑니다. 그리고 주와 함께 영원토록 살아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죽은 성도들의 부활과 그들이 예수님과 영원토록 함께 할 것에 대해서 가르치며 사랑하는 이들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성도들을 위로했습니다. 18절에 바울은 이러한 가르침을 따라 순교자의 유가족들과 성도들을 위로하라고 권면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바로 당장이라도 오실 것처럼 살았습니다. 물론 이는 틀린 것은 아니지만, 데살로니가의 경우 그 부작용으로 인해 일상을 포기하고, 일을 그만 두는 일들도 발생했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일상을 포기하지 말라고 권면하며 조용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그리고 최선을 다하여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언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지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와 시간은 오직 성부 하나님만 아십니다. 따라서 본문 5장 1절 말씀을 보면,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주님이 다시 오시는 때와 시기에 관하여 쓸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날은 도둑 같이 이를 것입니다. 도둑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도 어느 날 갑자기 재림하실 것입니다. 5장 1-3절을 봅시다. “(살전 5:1, 개정)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살전 5:2, 개정)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살전 5:3, 개정)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임산부에게 산통이 언제 임할지 임산부 자신도 모르는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의 날도 갑작스럽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든 것이 평안하다. 안전하다”하고 말하는 그 때에 주의 날이 갑자기 임할 것입니다. 임산부에게 말로 다할 수 없이 큰 해산의 고통이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것처럼 악인들에게 재난이 갑자기 닥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사건은 영생을 얻게 될 믿는 자들에게는 좋은 소식이고 복된 소식이지만, 예수님께 반항하고 살아가던 세상 사람들에게는 화가 미치는 소식이 됩니다. 그래서 3절에 바울은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를 것이라고 말했으며, 결코 그 날에 임할 재난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4절을 보면, 예수님의 날이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도둑 같이 임하지 못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집에 손님을 초대하고 손님이 오시면 깜짝 놀라서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재림이 도둑과 같이 갑작스럽게 오시는 사건이 되겠습니다만은,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 도둑이 아니라 다시 오실 것을 알고 기다린 귀한 손님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주의 재림의 날이 우리에게는 도둑 같이 임하지는 않습니다. 성도들은 어둠에 거하지 아니하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밤이나 어둠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영적인 무방비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갑작스럽게 임한 재앙이 되겠습니다만,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빛에 거하여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예수님의 재림이 매일 기다려 온 지극히 큰 복된 날이 될 것입니다. 평상시에도 예수님 맞을 준비를 하며 살아왔는데 무엇이 두렵고 당황스럽겠습니까? 도리어 신랑을 만나는 신부의 마음 속 기쁨처럼 기쁨이 가득합니다.

바울은 마지막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권면합니다. 6절을 봅시다. “(살전 5:6, 개정)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여기서 자지 말라는 말은 정말 육신의 잠을 자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겠죠? 죄악에 매여 살아가는 사람의 영혼은 잠이 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성도들의 영혼이 세상의 유혹과 마음의 탐심과 육체의 정욕에 매여 잠들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고 깨어 근신하여 살아가라는 권면입니다. 어둠에 속한 세상 사람들의 영혼은 술에 취한 듯 깊게 잠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빛의 아들이요, 낮에 속한 성도들은 정신을 차리고 주 예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살아야 합니다. 8절을 봅시다. “(살전 5:8, 개정)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라” 했습니다. 호심경은 적군의 공격으로부터 가슴과 배와 등을 보호해주는 갑옷입니다.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적군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줍니다. 전쟁에 나갔을 때 병사들의 몸에서 가장 연약하며 동시에 중요한 부위는 머리입니다. 그래서 머리에 헬멧을 쓰지요? 마찬가지로 바울은 성도들에게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라고 권면합니다. 예수님 다시 오시는 날, 구원 받을 것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우리 영혼을 보호해줍니다.

9절에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택하시고 부르신 목적은 하나님의 노하심을 받는 삶을 살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임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10절 보면 “깨어 있든지 자든지”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살아 있든지 죽든지”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10절을 해석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목적은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상관없이 그분과 함께 살게 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죽은 자들도 주님의 날에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여 예수님과 함께 영원토록 살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과 사랑과 구원의 소망을 갖고 살아갈 것을 성도들이 서로 권면하고 서로 이와 같이 살아감으로써 덕을 세워가라고 권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