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원에 가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기도원에는 각양각색의 사연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찾아옵니다. 죽을 병이 걸려 병원 의사도 고개를 가로 저으며 더 이상 해드릴 것이 없다고 판정 받은 분들, 예를 들면 암 말기 환자분들이거나, 불치병에 걸린 분들이 찾아옵니다. 회사가 부도나기 직전의 어려운 상황에 놓인 분이나, 가정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찾아온 분들, 젊은 자녀의 방황이 심해 어찌할지 몰라 괴로워하는 부모 등 다양한 사람들이 옵니다. 간절한 사연 때문에 기도원을 찾아 기도하는 분들을 보면 조용히 기도하는 분들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목 놓아 울부짖으며 기도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며 “사람 살려”하고 소리지르듯이, 모든 것이 기도에 달려 있는 것처럼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기도를 안 들어 주시면 나 죽습니다” 하는 식으로 정말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 속 등장하는 시인의 기도가 그러합니다. 시인은 매우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가 당한 고난과 어려움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으나 시 전체에서 나타나는 그의 절규에 가까운 탄식의 기도들은 시인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시인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다”고 고백합니다. 낮이건 밤이건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간절하게 울부짖으며 기도한 것입니다. 아마 목청이 터지라고 소리를 질러가며 하늘에 기도가 닿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을 것입니다. 시인은 그의 기도가 주님 앞에 이르게 되기를, 또한 그의 부르짖는 간절한 기도에 주께서 귀를 기울여 주시고 응답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3-5절을 보면 시인은 괴로움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자신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영혼은 괴로움으로 심히 지쳐 있습니다. 얼마나 괴로움이 큰지 거의 죽을 지경에 다다른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4절을 보니 심지어 시인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 그가 곧 죽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무 힘이 없는 사람 같았고, 사람들은 이미 그를 죽음 사람처럼 취급하고, 이미 무덤에 묻힌 사람처럼 쳐다보고 있습니다. 어쩌면 시인은 극심한 질병으로 인해 침상에 누워 있는지도 모릅니다. 큰 상처로 인해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는지도 모릅니다. 시인은 자신의 괴로움을 죽음에 이를 듯한 극심한 고통이라 말했습니다.
그러나 시인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가 아무리 부르짖고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주님께서 더 이상 기억하지 아니하는 사람처럼 지내는 것 같습니다.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처럼 대하시는 것 같습니다. 6절을 보니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를 짓누르고 계신 것이 마치 하나님께서 파도를 일으켜서 그를 덮쳐 괴롭게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8절을 보니 하나님께서 시인의 친구들을 그의 곁에서 떼어 놓으셨음으로 그들이 시인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빠져나갈 수 없는 덫에 걸린 몸처럼, 시인은 그러한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9절을 봅시다. “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힘들고 어려운 일로 눈물을 얼마나 많이 흘렸는지 눈물에 가려 시야가 흐려질 지경입니다.
자,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합니다. 죽을 것 같이 마음이 괴롭습니다. 벗어날 길이 도무지 보이지 않습니다. 끝이 없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는 것 같이, 괴로움이 사라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찾는 것을 포기합니다. 기도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구나 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는 더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았습니다. 이것이 말로는 쉬워 보일지 모르나, 막상 큰 고난이 닥치고 괴로움이 끝없이 길어질 때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믿는 것은 대단한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9절 후반절을 보십시오. 눈물이 눈 앞을 가리는 상황 속에서도 시인은 매일 같이 주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두 손을 주님을 향해 들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하나님 죽은 자가 어찌 주의 기적을 보고 하나님의 기이하신 일을 보며 주님을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무덤 속에 있는 사람이 어찌 주님의 크신 사랑을 세상에 알리며, 죽은 자가 어찌 주님의 변함없으심을 전하겠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 살려 달라는 거에요. 자신이 죽지 아니하고 살아서 주님의 기적을 맛볼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기도입니다.
13절에 시인이 다시 말합니다. “여호와여, 제가 주님께 부르짖으며 도움을 청하였으니 아침이 되면 제 기도가 주님께 닿겠죠?” 이와 같은 시인의 간절한 부르짖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습니다. 14절에 시인이 묻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십니까? 어찌하여 제게서 숨으십니까?” 시인의 영혼을 괴롭게 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부르짖고 기도해도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아무리 기도해도 나아질 것처럼 보이지 않는 상황, 오히려 나날이 더욱 악화되는 어려움, 갈수록 극심해지는 고통… 이 모든 것이 시인의 마음을 괴롭게 하였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진노가 자신을 파멸시켰다고 말합니다. 어릴 적부터 그는 죽음과 가까웠고, 주님의 분노가 그를 휩쓸고 가서 두려움에 죽을 것 같았습니다. 매일 같이 주의 분노가 홍수처럼 그를 밀어닥쳐 덮쳤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시인은 절망과 자포자기의 심정을 솔직하게 하나님께 털어 놓았습니다. 그는 처절한 외로움을 토로하며 18절에 하나님께서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친구들을 다 빼앗아 가셨다고 말하며 오직 어두움만이 그의 친구로 남아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오늘 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절망의 심연가운데서도 기도할 수 있는가?”, “만성적인 고난으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어도 포기하지 아니하고 기도하겠는가?”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도 기도할 수 있는가?”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며 의외로 성경에 기록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의 삶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100살이 되어서야 아들을 낳은 아브라함, 그의 아들 이삭은 무려 20년이 지난 후에야 아들 야곱을 낳았습니다. 요셉은 무려 10여년 넘게 애굽에서 노예와 죄수로 살아야 했습니다. 다윗도 사울 왕을 피해 긴 세월 동안 도망자 신세로 지내야 했습니다. 다니엘은 조국의 회복을 보는데 평생을 기다려야 했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데 무려 약 40년이나 걸렸습니다.
기도가 곧바로 응답 받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대부분 오래 인내함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성적인 고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계십니까? 아니면 극심한 고통으로 빗물처럼 흘러내리는 눈물이 두 눈 앞을 가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시인은 생사화복의 주권이 주님께 있다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가진 남은 한 줌의 소망도 주님께 향해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매일 믿음으로 인내하며, 주야로 기도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마침내 누리는 복된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