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믿음장]이라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을 통해서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으로 살아간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이미 그들에게 주어진 믿음의 경주를 잘 마쳤습니다. 이제는 마치 경기장 관중석에 앉은 사람들이 운동선수들을 응원하듯이, 믿음의 선배들은 우리들에게 같은 믿음의 길을 걸어가라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남겨준 믿음의 흔적들, 믿음의 유산이 우리에게는 큰 힘과 위로가 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들도 앞선 믿음의 선배들을 본받아 믿음으로 예수님을 향해 달려가자고 권면합니다. 달리기 경주를 하는 이가 결승점을 통과해야 상을 받듯이, 신앙의 경주를 하는 이들도 결승선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경주가 끝나는 결승점은 언제 찾아옵니까? 육체의 죽음입니다. 죽음 너머에는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계신 천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죽음의 결승선을 통과할 때까지 삶의 모든 과정에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1절에 모든 무거운 것,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고 했습니다. 마라톤 달리기 선수가 무거운 금목걸이 착용하고 뛰는 것을 본 적은 없습니다.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뛰는 것도 본 적이 없습니다. 바지 주머니에 물건을 가득 넣고 달리는 선수도 없습니다. 이런 것들이 뛰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달리기 하려면 몸을 최대한 가볍게 해야 하는데 뛰다 보면 심지어 그다지 무겁지 않은 자동차 키, 신용카드 하나 까지도 없이 가볍게 뛰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신앙생활이 이와 같습니다. 죄를 지으며 믿음의 경주하는 것은 45 파운드 되는 덤벨이 둔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매고 뛰는 것과 같습니다. 죄와 타협하는 것은 양 다리에 20 파운드짜리 모래주머니 달고 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누구라도 오래 신앙생활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제대로 신앙생활 할 수 없게 됩니다. 중간에 포기하거나, 신앙생활의 기쁨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들고 달리는 것은 기쁨이 아니라 고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경주를 제대로 하려면, 제일 먼저 무거운 짐과 같은 얽매이기 쉬운 죄들을 다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 영혼을 죄로부터 가볍게 만들어 놓고 그후 달려야 합니다. 죄와 타협하며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무거운 짐을 두 어깨에 메고 마라톤 하려는 사람과 같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또한 우리는 경주할 때 목표점을 확실하게 잡아야 합니다. 결승점을 잘못 인식하면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상을 받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결승선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달려가야 합니까?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가 될 때, 우리가 열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갈 때 비로소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 히브리서 저자가 말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신 이도 주님이시요, 우리에게 주신 이 믿음을 구원에 이르도록 완성케 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만 바라보고 살아가면 됩니다. 여기 2절에 사용된 ‘바라보자’라는 말은 ‘우리의 시선을 계속해서 고정하다’라는 뜻입니다. 달리는 경주마를 보신적 있으십니까? 경주마의 눈을 보면 좌우를 보지 못하게 시야를 차단하는 경마 장구를 착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차안대]라고 부릅니다. 경주에 임하는 말들이 차안대를 착용하는 이유는 말의 시야각을 차단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의 경우 눈이 얼굴 전면에 위치해 있고, 앞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좌우 시각이 대략 180도 정도 된다고 합니다. 말은 눈이 얼굴 양 옆에 달려 있는 까닭에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시야각이 300도가 넘어갑니다. 시야가 매우 넓은 것이죠. 한참 경주를 하고 있는데 좌우에 개, 고양이, 다람쥐 혹 다른 그 무엇이라도 말의 흥미를 유발할 만한 것들이 말의 시선에 들어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말이 그것에 이끌려 가다가 경주를 이탈할지도 모릅니다. 경주마가 경기에만 집중하도록 돕기 위해 착용하는 것이 바로 차안대인 셈이죠.
우리들도 예수님 바라보며 신앙생활 하다가 세상의 유혹에 이끌려 마음이 흐트러질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영적인 차안대를 착용해야 합니다. 말씀, 기도, 예배가 우리 영혼을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차안대]입니다. 그래서 삶 속에 말씀과 기도와 예배가 사라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자꾸만 세상으로 눈이 돌아가게 됩니다. 말씀과 기도와 예배가 사라지면 죄의 유혹을 더 자주 받게 되고, 죄의 유혹에 더 쉽게 넘어가게 됩니다. 날마다 말씀을 보고 읽음으로써 예수님께 우리 시선을 향하게 하고, 날마다 기도하고 예배 드림으로써 예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사실 말이 차안대를 차는 더 큰 이유는 흥미를 억제하는 목적보다도 말의 공포심을 억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말은 덩치만 크지 겁이 많은 동물이거든요. 낯선 물체가 갑자기 툭 튀어나오면 말이 깜짝 놀랍니다. 경주 중에도 옆에서 다른 말이 갑자기 툭 튀어나오면 말이 놀라서 다른 쪽으로 비키려고 하고 피하려고 합니다. 그럼 말이 경기를 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경주마는 늘 [차안대]를 착용하고 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폭풍이 휘몰아치던 배 안에 있던 베드로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예수님을 바라보자 배 밖으로 나왔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자 물 위를 걷게 되었습니다. 엄청나죠? 그러나 그가 시선을 돌려 예수님이 아닌 넘실대는 파도를 바라보자 마음에 두려움이 덜컥 찾아왔습니다. 폭풍우를 바라본 베드로의 마음에 믿음이 사라지자 그는 물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이처럼 큽니다. 베드로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는 비결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앞에 놓인 결승선만을 바라보게 하는 말의 차안대처럼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할 때는 앞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2절에 사용된 예수를 바라보라는 말을 원문에 의미에 가깝게 더 정확하게 해석하면 “fixing our eyes on Jesus”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께 계속해서 고정하자”가 더 정확한 해석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할 때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할 때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운동을 해보면 하루 열심히 땀 흘려 숨가쁘게 운동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진짜 어려운 것은 그 운동을 매일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반복해서 운동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도 하루 한 순간 열심히 뜨겁게 믿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날마다 그 뜨거운 믿음의 불길이 꺼지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번 예수님 바라보고 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순간 순간마다 예수님 바라보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날마다 예수님 묵상하고, 예수님 생각하고, 예수님 닮아가기 위해 내 성품을 계발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