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어회, 청국장, 낙지 볶음 같이 맛이 강한 음식을 좋아하는 부모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무리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이라 해도, 아직 위가 발달하지 않은 아기에게 이런 자극적인 음식들을 먹일 수는 없습니다. 너무 자극적인 음식들을 먹이면 십중팔구 아이 배가 탈이 나기 때문입니다. 아기들이 먹는 음식은 부드럽고 순한 맛의 음식들입니다. 그런데 아기가 자라서 20-30대 청년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이유식이나 젖을 먹고 있다면 또 어떻습니까? 그 역시 정상은 아닙니다. 어른이 되었으면 단단한 총각김치도 먹을 줄 알고, 고기도 씹을 줄 아는 단단한 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만일 다 큰 청년이 아기 때와 같이 여전히 위가 약해서 죽과 같은 유동식 음식 밖에 못 먹는다면 얼마나 가엾고 불쌍합니까?
오늘 히브리서의 저자가 그의 독자들을 바라보는 심정이 그러합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수준 높은 말씀을 가르치고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독자들이 여전히 신앙의 초보의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 되었으면 다른 이들을 가르칠 정도의 수준이 되어 있어야 마땅한데, 아직도 말씀의 초보 단계에 머물러 누군가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상태를 지적했습니다. 12절을 봅시다. “(히 5: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어린 아이가 젖을 먹지만, 다 큰 어른은 튼튼한 이가 있어 단단한 음식을 씹어 먹을 수 있는 것처럼 신앙이 성숙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깊이 있는 수준까지 나아갈 수 있어야 했으나, 성도들은 아직까지도 말씀의 깊이를 경험하지 못하고 초보자의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지체 장애자를 자녀로 둔 부모의 슬픔을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자녀의 육체는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데, 정신은 어린 아이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 사실이 부모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고 슬프게 만듭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의 연수는 더해가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수준이 초보의 수준에 머물러 자라지 않는다면,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혹시 이 이야기가 우리들의 이야기는 아닙니까? 예수를 믿고 따르고 있으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자라나지 않고, 제자리에 맴돌고 있지는 않습니까? 히브리서 저자는 레위 지파 출신이 아니며, 아론의 후손도 아닌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는지 설명하기 위해서 구약의 멜기세덱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지금 그의 편지를 읽는 독자들 대부분이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멜기세댁에 대해서 부연 설명해야 할 정도로 성도들이 진리에 대한 내용들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배움의 열의가 없으면 성장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성도들이 예수를 믿지만, 말씀을 배우는 일을 등한시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성숙도는 연수로 따질 수 없습니다. 모태신앙으로 수십년 동안 신앙생활한 사람보다도, 교회 나온 지 채 10년도 안 되었으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품 모두 앞서 가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가장 큰 차이는 말씀에 대한 배움과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말미암은 체험의 여부에 있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녀도 미성숙한 사람들의 특징은 말씀에 대한 배움이 얕고, 말씀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구원의 진리를 배우고, 그 말씀을 실제 삶에 적용한 경험이 있을 때 성숙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신앙의 연수는 쌓여 가지만, 여전히 미성숙한 그의 독자들을 향해 말씀의 초보 단계를 버리고 완전한 단계로 나아갈 것을 권면합니다. “(히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히 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신앙의 초보에 머물지 아니하고, 성숙한 제자의 단계까지 자라가는 일은 모든 신자가 추구해야 하는 경건한 삶의 자세입니다. 1-2절을 보면 가장 기초적이며 동시에 핵심적인 믿음의 내용들이 등장합니다. 죽은 행실을 회개함, 하나님께 대한 신앙, 세례와 안수, 주님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 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이야 말로 복음의 기초이자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진리의 말씀들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내용을 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굳게 붙들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간다면 완전한 데로 나아갈 것입니다. 즉 영적 성숙과 성장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4-6절은 성경의 난해 구절입니다. 만일 어떤 성도가 미성숙하여 거짓에 휘둘려 진리를 떠나게 되면 다시 회개하여 새롭게 되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구원에 참여한 상태에서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장차 올 세상의 능력을 맛 본 경우 이런 사람은 회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이 신자 된 자가 죄를 지으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버림 받는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위배 됩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 베드로 등 수많은 성경 속 인물들이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섬기다가 시험에 들거나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죄를 뉘우치고 다시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죄를 범해도 또 다시 회개하면 주님께 돌아올 수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자의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일반적으로 신자가 죄를 범한다고 해서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구원 받은 자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진리가 아닌 거짓을 따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로 말미암은 구원의 길을 버리고, 거짓 교사들이 가르치는 거짓 교훈에 빠져 잘못된 길을 선택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내신 일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부인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은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욕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 때는 예수님을 믿는 신자처럼 보였습니다만, 훗날 예수님을 철저하게 부인하고 돌아선 자가 회개하라는 권면과 마음을 새롭게 하라는 권면을 받아들일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처럼 예수님을 버리고 거짓 교훈으로 돌아선 자는 회복이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좋은 채소를 내는 땅은 복을 받습니다만, 먹을 수 없는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땅은 저주를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열매를 맺는 삶을 복을 받습니다만, 복음을 들었음에도 거짓 교훈을 따르고 죄악의 길을 따르는 삶은 저주에 이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