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기록된 안식일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으로 보면 토요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던 날은 금요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하루 전날에 돌아가신 것이죠. 31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날을 가리켜 ‘준비일’이라고 했습니다. 하루 뒤에 있을 안식일을 준비하기 위한 날이 금요일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31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금요일 다음날 찾아오는 안식일은 보통 안식일이 아니라, ‘큰 날’이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이 시작되는 안식일이었습니다.
유월절의 유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리신 마지막 재앙이 바로 장자의 죽음 재앙이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재앙을 피할 수 있도록 양 한 마리를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족끼리 함께 집 안에 모여 잡아 죽인 그 어린 양의 고기를 먹도록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죽음의 사자가 문에 바른 양의 붉은 피를 보고 그 집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습니다. 다음 날 일어나 보니, 애굽 왕 바로부터 천한 자까지 애굽의 모든 장자는 죽음을 피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애굽 전체가 장자를 잃어버린 가족들의 애통하는 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음의 사자가 어린 양의 피를 보고 집을 넘어갔기에 아무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이와 같이 어린 양의 피를 보고 죽음의 사자가 집을 넘어간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가 바로 유월절입니다.
통상 유월절 전날 금요일은 유월절을 준비하기 위해서 양을 잡는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성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날 역시 유월절 바로 전 금요일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날 돌아가신 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닙니다. 이는 죽음의 사자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유월절에 잡은 양과 같이, 예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피를 흘리신 하나님께서 택하신 유월절 어린 양 되심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죽으신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3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 19: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31절에 기록된 ‘큰 날’은 히브리 달력으로 유월절이 시작되는 니산월 14일을 가리킵니다. 이 날은 유대인들이 출애굽한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어린 양의 고기와 무교병, 쓴 나물을 먹는 특별한 식사를 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7일 동안 무교절이 시작됩니다. 이 유월절 절기가 시작되는 안식일을 가리켜 ‘큰 날’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다음 날이 바로 이 ‘큰 날’이었습니다. 다음 날이 안식일이기도 하고, 특별히 유월절이 시작되는 ‘큰 날’로써의 안식일이었기에 사람들은 특별히 이번 안식일에는 아무도 일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거룩한 날에 부정한 죄수들의 시체들이 나무에 달려 있는 일이 없기를 바랬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빌라도를 찾아가 십자가에 달린 죄수들의 다리 뼈를 꺾어 그들이 조금 더 빨리 죽게 해줄 것을, 그래서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시체를 처리할 수 있게 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죄수들이 장시간 십자가에 매달려 있게 되면 몸의 무게 때문에 폐가 짓눌려 극도의 호흡곤란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죄수 두 다리 밑에 발판이나 받침대를 만들어 숨을 쉴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죄수의 다리 뼈를 꺾어버려서 두 다리로 체중을 지탱하지 못하게 되면 오로지 두 팔의 힘만으로 온 체중을 버텨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더더욱 호흡하기가 어려워지게 되고, 결국 숨을 더 빨리 거두게 됩니다. 보통 죄수가 십자가 위에서 2-3일 정도는 살아 있다가 죽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아직 한나절도 다 지나지 않았건만 죄수들의 다리 뼈를 부러뜨려 사형수로 하여금 금방 죽도록 하는 것은 그들에게 비참한 고통을 가중하는 행위였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자신들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명목으로 이처럼 잔인한 행위를 빌라도에게 요청한 것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사악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이었는지 느끼게 됩니다.
총독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안식일 준수가 얼마나 중요한 계명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유월절 안식일은 1년 중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날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불만을 사고 싶지 않았던 빌라도는 종교 지도자들의 요청을 들어주었습니다. 이에 로마 군인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죄수들의 다리 뼈를 차례대로 꺾어 버렸습니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로마 병사들은 주로 이 일을 위해 거대한 나무 망치를 사용하여 다리를 내리쳤다고 합니다. 32-3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 19:32)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요 19:33)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통상적으로 죽음에 이르는데 2,3일 걸리는 십자가 처형인데, 예수님께서 반나절만에 돌아가셨다는 것은, 이미 채찍질 당하신 예수님께서 육신적으로 연약해진 상태였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오르실 수 없을 정도로 몸에 힘이 빠져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반나절만에 돌아가신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모든 고통은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 곁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두 죄수의 다리 뼈를 꺾은 로마 군사들은 이제 예수님의 뼈를 꺾기 위해서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미 예수님은 숨이 멎고 돌아가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다리 뼈는 꺽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로마 병사들이 예수님의 뼈를 꺽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아무 뼈도 꺾이지 않고 돌아가셨다는 사실 안에는 중요한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앞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날이 바로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날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하나님께서 보내신 유월절 어린 양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 규례를 주시면서, 명령하신 것이 있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을 잡되 그 양의 뼈를 꺽지 말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2장 46절과 민수기 9장 12절을 말씀을 보면, 유월절에 잡은 어린양은 그 뼈를 꺽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 12:46)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 (출 12:47) 이스라엘 회중이 다 이것을 지킬지니라” “(민 9:11) 둘째 달 열넷째 날 해 질 때에 그것을 지켜서 어린 양에 무교병과 쓴 나물을 아울러 먹을 것이요 (민 9:12)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 따라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뼈가 꺽어지지 않으시고 죽으셨다는 것은, 진실로 예수가 그의 백성들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지기 위해 죽으신 유월절 어린 양 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 7절을 찾아봅시다. “(고전 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사도 바울은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들의 유월절 양이심을 분명하게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은, 그 분이 악인의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 의인의 죽음을 겪고 계심을 증거하는 또 하나의 사건입니다. 시편 34편 19-2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시 34:20)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시편 34편에 기록된 메시아에 대한 예언 내용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성취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모든 뼈를 보호하셨고, 그로 인해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처럼 로마 병사는 이미 돌아가신 예수님의 다리 뼈를 꺾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의 죽음을 확실히 확인하기 위해, 그가 혹시 살아 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군인 중 한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34절을 보니, “(요 19: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하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찌른 날카로운 창은 예수님의 내장 속 깊이 파고들어 몸 안의 피와 수액이 흘러나오게 했습니다. 스가랴 12장 10절 말씀을 보면 “그들이 그 찌른 그를 바라보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 병사가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름으로써 앞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이 예언의 말씀도 그대로 성취 되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부인하던 이단 중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살아 있던 것이 아니냐?”하고 반박하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그 순간, 바로 그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입니다. 따라서 요한은 이처럼 상세하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정확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몸에서 피와 물이 나왔다는 것은 예수님의 육체가 완전히 파괴되고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35절을 봅시다. “(요 19:35)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 요한은 자신이 직접 목격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자신이 목격한 현장을 이렇게 증언하는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의 죽음이 확실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 입니다. 당시 이단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며, 예수님의 죽음조차 인정하지 않았기에 사도 요한은 이와 같이 예수님의 확실한 죽음을 자신이 보았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38절부터는 예수님의 장례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기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입니다. 이 두 사람 모두 산헤드린 공회원입니다. 38절을 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이지만, 유대인들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9절을 보면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던 시간을 사람들이 잠든 있는 어두운 ‘밤’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 모두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으나, 유대인들 앞에서 자신들의 믿음을 당당히 밝히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 이후 이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르게 행동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당당하게 빌라도에게 찾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극히 싫어하는 동료 산헤드린 공회원들과 종교 지도자들의 눈 밖에 나는 행동이었고, 자칫 잘못하면 빌라도의 심기를 건드려 아리마대 요셉도 위기에 처할 수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니고데모도 이제는 그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예수님의 장례 때 필요한 물품들을 다 공급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은밀한 제자로서 살았으나, 예수님께서 끔찍하게 십자가 처형당하는 모습을 본 후, 오히려 일어나 주님의 장사 지냄을 앞장서서 행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어떤 제자들은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예수님 곁에 머무른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가운데 오히려 믿음을 더 확실하게 나타낸 자들도 있었습니다. 세상은 지금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조롱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세상의 조롱과 모욕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됨을 부인합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가 바로 나의 유월절 어린양, 나의 구원자, 나의 메시아 되심을 고백하고 계십니까? 어떤 세상의 핍박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제자 됨을 포기하지 않을 마음의 결단이 있으십니까?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전부를 내어 주셨습니다. 그 주님을 위해 우리들도 변함없는 충실한 믿음으로 주님을 따라 가는 참 된 주님의 제자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