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 중에는 “진실로 진실로”라는 강조 어구가 사용된 경우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중요한 말씀을 이야기하실 것임을 알려줍니다. 요한복음 10장 1-2절을 보면 바로 이 “진실로 진실로”가 사용되었습니다. 어떤 내용이 있길래 예수님께서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계신 걸까요? 말씀을 함께 같이 읽겠습니다. (10: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10: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말씀을 보니, ‘양의 문’ 비유가 나옵니다. 양의 문이 참된 양의 목자와 양을 훔치러 온 도둑, 강도를 구분하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는 내용입니다. 양의 문을 통해 들어오는 자는 양의 목자입니다. 그러나 양의 문을 통해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다 도둑이고 강도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양의 문을 통해서 도대체 어디로 넘어간다는 말일까요? 성경 학자들은 ‘양의 문’이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구원의 문’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에서 문이 아니라 다른 데를 통해 넘어가는 자는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이 아닌 다른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물론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고 있는 ‘도둑’과 ‘강도’는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인정하지 않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율법사와 같은 유대인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모세의 율법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으며 또한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도록 가로 막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이 바로 양을 훔쳐가는 도둑이요 강도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또한 양의 문으로 들어간 자를 가리켜 ‘양의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의 비유에서 ‘양의 목자’는 분명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양의 문을 통해 지나가는 목자들은 주님의 제자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양을 먹이라고 부탁하신 것을 볼 때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제자들도 ‘양의 목자’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죠. 지금도 세상에는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께로 영혼들을 인도하는 참 된 양의 목자들이 있는가 하면,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다른 방법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양들을 유혹하는 도둑, 강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3절을 봅시다. “(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않은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바로 바리새인, 사두개인, 율법교사들과 같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목자 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즉 양으로 상징되는 한 영혼 한 영혼이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인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4-5절 말씀을 봅시다. “((10: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10: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불러 내시고, 그 양들보다 앞서 가십니다. 목자가 양을 부르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를 따라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 속한 양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나 양들은 목자가 아닌 타인이 부르는 경우에는 그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를 따라가지도 않고 도망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 속한 양들은 도둑과 강도들의 음성을 듣지 않는 것이죠. 예수님 시대에 당국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이단이라 비난하며 그를 따르는 자들은 출교 시키겠다는 엄포를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따라는 양들은 예수님 외에 다른 도둑과 강도들의 음성을 듣지 않습니다. 참된 주님의 양은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갑니다.
7절을 보면 또 다시 ‘진실로 진실로’가 등장합니다.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양의 문이심을 다시 한 번 강조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이야말로 구원의 문이라는 것을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이전에도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한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대해 예수님은 8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0: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자칭 메시아라 한 자들이 도둑이요 강도들이라 말씀하시며 실제로 하나님께 속한 양들이 그들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역시 전 세계 수많은 이단들이 존재하고 수많은 자칭 메시아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들도 결국 영혼들을 바르지 못한 길로 유혹하는 도둑과 강도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매우 단순하면서 동시에 분명합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9-10절 입니다. “(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양은 어떤 목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의 삶의 질이 전적으로 달라집니다.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꼴을 먹으며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 자만이 생명의 떡을 먹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수를 마시게 됩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양의 문으로 들어오지 않은 도둑과 강도들은 양들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킬 뿐 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선한 목자’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선한 목자의 특징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데 있습니다. 양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리신다는 것은 주님의 대속적 죽음, 즉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세례 요한은 증언했습니다.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양들의 죄를 대신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양을 위해 희생하는 선한 목자 그 분이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14절에 예수님은 다시 한번 자신이 선한 목자이심을 강조하시며 자신과 양은 서로 잘 아는 관계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앞서 요한복음 10장 3-4절을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들기까지 합니다. 그만큼 목자와 양들은 서로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속한 양들과 자신이 서로 친밀한 관계에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15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여기서 양과 자신과의 관계가 마치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알고, 자신이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가 서로 사랑하는 관계이듯이, 또한 하나님과 예수님이 서로 상호 내주 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영혼들은 주님과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되며, 서로 상호 내주하는 관계가 됩니다. 즉 우리가 주님 안에 있게 되고 우리 안에 주님이 거하시는 관계가 됩니다. 이러한 깊은 친밀함이 주님의 양들에게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양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예수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바로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대목 입니다. 진실로 우리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선한 목자이십니다.
16절에 예수님은 또 다른 양들이 있음을 언급하셨습니다. 이 양들은 우리에 들지 않는 양들 입니다. 그러나 곧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될 양들 입니다. 이들은 누구일까요? 바로 이스라엘 밖의 이방인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주로 이스라엘 민족을 대상으로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이방인에 대한 선교 사역을 명시적으로 말씀하시거나 명령하신 적은 없으십니다. 그러나 이방인 선교에 대한 구절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인 사마리아 여인 구원 사건은 이러한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예수님의 관점을 잘 보여줍니다. 당시 이방인으로 여겨지고 심지어 개와 같이 천하게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 사람들을 구원하심으로 예수님은 복음이 유대인이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이방 영혼들을 포함하게 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들이 바로 16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들도 바로 이러한 양들 가운데 포함됩니다. 본래 육체적으로 유대인이 아닌 우리들도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께서 돌보시는 양의 무리에 들어오게 됨으로 주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어주셨습니다.
17절에 예수님은 자신의 희생이 자발적인 헌신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아감으로 주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빼앗기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 의해서 죽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발적으로 희생이요, 헌신이었습니다. 18절에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에 뜻에 따른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순종의 죽음입니다. 자신의 죽음이 세상에 생명을 주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의 양들을 사랑하사 친히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자발적으로 내려놓으신 것 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은 실로 아름다운 죽음이고 영광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내려놓는 것이 곧 생명을 되찾는 길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죽음 그 자체로 끝나지 아니하고 영광스러운 부활로 이어지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이제 그의 사랑하는 양들의 부활로 전해지는 위대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실로 우리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양들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양에게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양이며 동시에 예수님으로부터 양 떼를 위탁 받은 제자들 입니다. 오직 참 된 예수님을 따라감으로써 생명을 얻되 풍성한 삶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또한 우리에게 맡겨 주신 귀한 영혼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여 그들 역시 생명을 얻되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귀한 사명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