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28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라 (골로새서 3장 1~11절)


오늘 성경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위의 것’ 입니다. 3장 2절을 보겠습니다. “(골 3: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여기서 ‘위의 것’이란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정의를 가리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로 세워갈 것인가?”하는 자세를 가지고, 주된 관심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순종하는 사람의 모습이 바로 위의 것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즉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 영혼을 전도하는 것, 믿음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모든 것이 다 위의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위의 것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반대로 땅에 있는 것이란 ‘세속적인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변질되고 썩어질 것들입니다. 육신의 일, 세상 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건강, 재물, 명예, 권세, 탐욕 이 모든 것이 땅의 일입니다. 땅의 것을 찾지 말라는 말씀은 이런 일시적이고 지나가는 것을 주된 삶의 관심사 혹은 인생의 목표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땅의 것은 탐하게 될 때 그의 영혼은 더럽혀 지며, 삶은 불경건하게 변하고 부도덕한 삶으로 이끌려 가게 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땅의 것을 추구하거나 삶의 주된 목표로 삼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6장에서 우리의 마음을 세상 염려에 빼앗기지 말고, 우선순위를 하나님 나라에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먹고 사는 문제가 안 중요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 때 의식주만큼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문제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하나님 나라를 중요하게 여기며 삶의 우선순위를 거기에 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우선순위 역시 먹고 사는 문제나 세속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들이 우선시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위에 것을 다양하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가장 강조하고 있는 위의 것은 바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생각하고, 그 분을 마음으로 묵상해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찾을 때 우리는 위의 것을 찾고 살아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실존적인 하나의 딜레마가 떠오릅니다. 어떻게 이처럼 바쁘게 일터에서 일하고 살아가는데 위의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겠습니까? 또한 먹고 사는 문제 하만 해도 해결하기 급급한데 어떻게 언제 예수님을 떠올리고 묵상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명령은 고요한 기도원이나 수도원에 사는 성직자들이나 가능한 삶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평화롭고 종교적인 시설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쓴 글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은 위의 것을 추구하며 살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위의 것은 무가치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면, 우리 역시 위의 것을 버리고, 땅의 것, 육신의 필요와 만족만 바라보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위의 것을 추구할 수 있는 영적인 비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절을 보니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정말 이미 죽어버린 망자들에게 이 편지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는 골로새 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 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 바울은 ‘이는 너희가 죽었고’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는 지금 우리의 옛 사람이 죽었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세상이 전부인지 알고 그것만을 좇아 살았던 옛 사람, 죄악 행하기를 즐기며, 육신의 정욕과 세상의 탐욕을 강하게 갈망하던 옛 사람이 죽었다는 선포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옛 사람이 주님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혀 죽은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중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중생(重生)을 얻은 그리스도인은 이제 그의 주된 관심을 땅의 것들에게 두지 말고 하늘의 것들에 두어야 합니다. 중생을 통해 옛 사람은 죽었으므로 이전처럼 땅의 것을 추구하며 살아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이 하루 우리의 주된 관심을 땅의 것이 아니라, 즉 천국 소망, 구원의 역사, 순종의 삶 같은 위의 것들을 구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모두는 본래 죄로 인하여 영혼이 매우 더러워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죄의 옛 사람을 다시 입어서는 안 됩니다. 옛 사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5-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땅의 있는 지체란, 인간의 마음 속 자리잡은 욕망이고 탐심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음란, 부정, 사욕, 정욕, 탐심… 이러한 것들이 바로 ‘땅의 지체’ 곧 ‘옛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세속적인 것들을 욕망하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타협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의 지체를 죽이라”는 말로 강력하게 명령했습니다. 비록 우리가 이 땅 가운데 살아가지만, 현실 속에서 깨어서 영적 전투를 수행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사도 바울은 치열한 매일매일의 영적전투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는 아직 이 세상에서 불완전한 육신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거룩한 연합을 이루었으므로,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 세상의 탐욕, 육체의 정욕과 대항하여 싸우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영적 전투라는 말을 씁니다. 전투는 소풍이 아닙니다.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움직이고, 한시도 긴장을 놓치 않는 것이 전투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평화롭게 안주해서는 이 싸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마치 군인이 자신의 무기를 점검하듯이, 철저하게 말씀으로 무장하고 지속적으로 영혼의 전선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적은 ‘죄’입니다. 죄는 마치 코브라의 맹독처럼 성도들의 영혼을 죽이려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죄의 영향이 미치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사탄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죄로 유혹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안일하게 영적전투에서 방심하게 하고, 안일한 신앙 생활을 부추겨 전투 불능 상태의 무능력한 군사로 만들어 버립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우리가 영적 싸움을 감당할 때 방심하지 말고, 사탄의 온갖 시험을 깨어 대적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우리는 매순간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 전투에 참여한 군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쓴 대상이 되는 골로새 교회 성도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고백하는 구원받은 신자들 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벗어 버려야 하는 죄가 남아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7-8절 말씀입니다. “(골 3: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골 3: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8절 말씀에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골로새 성도들에게도 아직 벗어 버려야 하는 죄의 습관들이 남아 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명령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이 완전해진 것은 아닙니다. 아직도 우리는 세상적이고 육신에 속한 탐욕적인 죄의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를 끊어내고 옛 지체를 벗어버리라고 권면 했습니다.
자, 그런데 8절 말씀에 나오는 땅의 지체의 모습들을 다시 한 번 살펴 보겠습니다. “(골 3: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흔히 일반적으로 ‘죄’하면 강도, 살인, 강간 이런 큼직한 범죄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당신은 죄인이다’ 하면 큼직한 범죄를 저지른 적 없기 때문에 자신은 죄인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동일한 이유로 자신은 죄가 없는 깨끗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8절에서 말하고 있는 땅의 지체, 옛 사람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분노, 악의, 비방, 입에서 나오는 더러운 말, 부끄러운 말 입니다. 예수 믿는데도 툭하면 분을 내고, 상대방에 대해서 뒤에서 좋지 않게 이야기하고, 입으로 욕하고.. 사도 바울은 이처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목록을 적어 두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분냄’, ‘노여움’, ‘악의’, ‘비방’, ‘부끄러운 말들’ 같은 죄들을 얼마나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까?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자주 나타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렇나 죄들 역시 하나님의 진노에 이르는 심각한 죄들 임을 밝히 말했습니다. 강도, 살인, 방화, 강간 이러한 죄만 죄가 아니라, 남에 대하여 비방하는 것, 다른 사람을 증오하고 미워하고, 그 사람에 대해서 비방하는 것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깨끗하게 씻어주신 영혼을 다시 더럽히는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9절-10절을 보겠습니다. ”(골 3: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골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여기 9절에 보니 ‘거짓말’에 대해서도 이야기 합니다.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은 큰 죄로 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실 때 거짓말도 큰 죄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죄 된 옛 본성과 싸워 이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의 습관들을 버리고, 새로운 사람을 입어 계속해서 주 안에서 자라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어 이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목욕 후 더러워진 옷을 다시 입는 이는 미려한 사람이듯이, 예수를 믿고 나서 또 다시 옛 사람을 입는 사람은 무지한 사람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모욕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철저하게 무장하여 처절한 영적 전투를 감당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