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마트에 물건을 사기 위해서 들어갔다고 한 번 생각해봅시다. 긴장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고 싶은 물건 들고 계산하고 나오면 됩니다. 그런데 만일 똑 같은 그 마트에 물건을 훔치기 위해서 들어간다고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사람들 눈치를 자꾸 보게 될 것이고, 손바닥은 땀에 젖었고,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흐를 것입니다. ‘물건 훔치다 걸리면 어떻하지?’하는 불안감에 호흡도 가빠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악을 저지르는 자가 갖게 되는 고통입니다.
1절 말씀에서는 ‘악인은 쫓아 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을 친다고 했습니다. 옛말에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도 도둑 스스로가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죄를 지은 사람은 누가 고발하지 않아도, 자신 안에 있는 양심이 그를 고발합니다. 사람들의 기침 소리에도 놀라고, 자기 집 초인종 소리에도 놀랍니다. 사람은 이것이 바로 죄를 지은 사람이 겪게 되는 죄책감입니다. 붙잡혀 갈까 불안하고, 염려가 되어 잠도 잘 못 잡니다. 그러나 의인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언제나 담대합니다. 심지어 경찰 아저씨가 옆을 지나가도 불안해 하거나 걱정할 이유가 하나 없습니다. 오히려 경찰이 곁에 있다는 이유로 보호받는 심정입니다. 마찬가지로 악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심판하실 것을 알기에 늘 불안하지만, 의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실 것을 알기에 담대합니다. 악을 행한 자는 평점심도 잃어버리고 일상생활 속에서 불안과 염려로 살아겠으나, 의를 행하는 자는 언제나 평강과 안식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는 하늘의 평강을 누립니다. 죄악을 멀리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감으로 오는 이 평강을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절을 봅시다. “(잠 28:2) 나라는 죄가 있으면 주관자가 많아져도 명철과 지식 있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장구하게 되느니라” 한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들의 부패 정도가 심해지면 나라의 기능 자체가 멈춰버립니다. 또한 부패한 정치인들이 있으면 지도자들이 자주 바뀝니다. 말 그대로 나라 전체가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게 되면 나라가 안정을 얻게 됩니다. 2절에서 말하는 명철과 지식이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가치관대로 나라를 운영하는 지도자를 가리킵니다.
절대적 가치의 기준인 성경이 무너져 내리면,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는 시대가 도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세대가 사라지고 개인의 생각과 의견을 중요시하는 세대가 찾아옴으로써 낙태, 동성애, 동성결혼, 성전환 수술, 안락사, 마약과 같은 죄악들이 정상적인 생활로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도래하고 말았습니다. 합법적으로 낙태를 하고, 합법적으로 동성이 결혼하고, 합법적으로 안락사와 마약을 이용하는 아주 혼란한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명철과 주님의 절대적 말씀을 통해 배운 지식을 가지고 나라를 운영해가려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로 인해 나라는 지속되고 안정되어 갈 수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의 사명은 바로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국가와 나라를 운영해 갈 수 있는 새로운 세대를 양육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국가를 하나님의 뜻과 방법대로 운영해 갈 수 있는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되어야 합니다.
4절을 봅시다. “(잠 28:4)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하나님의 법을 버린 자는 양심을 버리고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을 칭찬합니다. 옛말에 유유상종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쁜 사람들은 자기와 같이 나쁜 사람들끼리 친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의 잘못된 가치관을 따라야 할 필요도 의무도 없습니다. 죄악의 길로 함께 가자고 유혹하는 자들을 따르지 않고, 어울리지 아니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상과 벗이 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인의 유혹을 대적하고 피해야합니다. 5절 말씀처럼 악인들은 무엇이 공의 즉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인지 하나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전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벗이 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악인의 유혹을 대적해야 합니다.
6절을 봅시다. “(잠 28:6)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사곡히 행하는 부자보다 나으니라” 성실하게 일하지만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거짓말과 속임수로 불법을 행하면서 부자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일까요? 세상은 결과만 봅니다. 그래서 부자만 될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난하게 살아간다 할지라도 성실하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이 죄악 된 방법으로 부자가 된 사람보다 낫다고 평가해 주셨습니다. 6절 말씀과 연결되는 18절을 봅시다. “(잠 28:18) 성실히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나 사곡히 행하는 자는 곧 넘어지리라” 아무리 많은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 할지라도 악을 행하는 자의 미래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는 멸망의 길로 걸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가난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 성실과 정직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는 미래에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반드시 붙드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는 것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낫습니다. 의인이 가진 소망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시지만, 악인이 가진 소망은 하나님께서 끊어 버리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불의한 방법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보다, 가난하게 살아도 믿음으로 의롭고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사는 길을 택해야 합니다.
9절을 봅시다. “(잠 28:9)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과 방법대로 살아가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자신의 계획과 뜻만 고집하며 하나님께 자신의 기도를 제발 좀 들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하나님 보실 때 가증한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가난해도 성실하고 정직하게 사는 것을 원하시는데, 그러한 삶에는 관심이 없고, 불의를 행해서라도 부자가 되려고 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어찌 그런 자의 기도를 기쁘게 보시겠습니까? 하나님께 구하기 앞서 먼저 자신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14절입니다. “(잠 28:14)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자는 복된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무시하고 고집 부리며 자기 멋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재앙에 빠지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코웃음을 치며 마음을 강퍅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무시하는 교만한 자들은 재앙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죄를 삼가며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삶을 살아가는 최고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