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마음에는 양심이 있고, 반드시 지키고자 하는 정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위반되면 우리는 분노합니다. 최근 한국에서 일어난 ‘정인이 사건’ 같은 경우도 인간이라면 결코 해서는 안되는 일을 저질렀기에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사고 있는 것이죠. 하물며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보실 때 정의를 무너뜨리는 사람을 얼마나 미워하시겠습니까? 15절 말씀을 봅시다. “(잠 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라” 뇌물을 받았든지, 사적인 이익과 연관 되어있든지, 어떤 이유로든, 악한 자를 의롭다 하고, 의로운 자를 악한 자라고 거짓된 판결을 내리는 것은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죄악입니다. 한 번 예를 들어봅시다.
묻지마 살인을 저지른 한 범죄자가 있습니다. 죽은 피해자는 살인자와 아무런 연관도 없습니다. 홧김에 저지른 우발적인 살인이었습니다. 얼마나 억울한 죽음입니까? 유족들은 깊은 슬픔에 빠졌고, 시민들이 분노가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막상 재판이 열리고 보니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습니다. 재판관이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를 무죄라고 선고하고, 죽은 피해자에게 죄가 있다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라 전체가 발칵 뒤집히지 않겠습니까? 왜 이와 같이 잘못된 재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들고 일어날까요? 인간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정의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정의를 왜곡하는 자들을 미워하십니다. 이런 사악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들도 정의로운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참된 지혜입니다.
16절을 봅시다. “(잠 17:16) 미련한 자는 무지하거늘 손에 값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 함은 어찜인고” 미련한 자는 값을 지불하고 물건을 사는 것처럼, 돈으로 지혜를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혜는 아무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 아니며,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지혜입니다. 성경은 돈을 주고 지혜를 살 수 없다고 말하며, 그와 같이 돈으로 지혜를 얻으려는 자는 자신의 미련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의 뜻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우리들도 주의 말씀에 순복할 때만이 주의 지혜를 받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잠 17:17)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 평상시에 친한 친구인 줄 알았는데, 내가 위급한 상황에 몰리자 나를 배신하고 떠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다 나를 향해 들을 돌려도 끝까지 내 곁에서 함께 해주는 친구가 있습니다. 진정한 친구는 한결 같은 우정으로 대해줍니다. 그래서 역경을 당할 때 진짜 친구가 더 뚜렷하게 드러나는 법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나의 친구라”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죄악으로 인해 죽어가는 우리들을 외면하지 않으셨고,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예수님의 좋은 친구입니까? 일이 잘 풀리는 좋은 날에는 예수님과 친하게 지내지만,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일을 위해서 거짓말을 해야 하거나 양심을 속여야 할 때, 예수님을 모르는 척하고 슬쩍 등을 돌리고 있지는 않을까요? 진정한 친구는 언제 어느 때가 변함없는 우정으로 상대방과의 의리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친구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신실하신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을 배반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우정과 의리를 지키는 친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1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잠 17:19)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요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니라” 다른 사람들과 싸우고 다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기를 좋아하는 미련한 사람입니다. 19절 말씀을 보면 “자기 문을 높이는 자”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오만한 자’를 가리킵니다. 부귀와 권세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부와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집 대문을 높이는 행위로써, 높아진 집문처럼 높아진 교만을 나타내는 비유입니다. 그와 같이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자기를 과시하는 교만은 ‘파괴’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20절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두 가지 유형에 대해서 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0절을 봅시다. “(잠 17:20) 마음이 사특한 자는 복을 얻지 못하고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지느니라” “마음이 사특하다”는 것은, 간사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웃을 속이는 사람, 비뚤어진 마음을 품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또한 “혀가 패역한 자”라는 것은 거짓말하는 혀를 가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와 같이 거짓으로 이웃을 속이는 자는 결국 고난에 빠지게 될 것이고 재앙을 겪게 됩니다.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을 반드시 심판하시고 벌을 주십니다.
22절 말씀을 봅시다. “(잠 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하나님을 섬기며 주의 말씀을 마음에 둔 사람은 그 마음에 즐거움이 찾아옵니다. 심령이 평안하고 즐거우니 몸도 마음 따라 건강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버리고 물질적인 것만 탐욕스럽게 추구하는 자는 더 많이 갖지 못해 늘 근심이 가득합니다. 몸에 근심과 염려가 가득하니 뼈도 마릅니다. 마음의 근심이 영혼의 생명을 죽이고 삶을 파멸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26절 말씀을 함께 봅시다. “(잠 17:26) 의인을 벌하는 것과 귀인을 정직하다고 때리는 것이 선치 못하니라” 26절 말씀은 앞서 살펴본 15절 말씀과 그 뜻이 유사합니다. 악인을 의롭다 하는 것, 의인을 악하다고 그릇되게 판단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하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완벽한 공의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도 실현되기를 간절히 구하는 기도 제목입니다.
무엇이 옳은가를 분별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무엇이 바른 것인가를 말씀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이 세상의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주의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시는 정의로운 삶을 살아가십시오. 그 길이 생명의 길이고, 복된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