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가난을 싫어합니다. 이 세상에 가난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문제는 사람들이 ‘가난’만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도 미워하고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가난한 이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깁니다. 그러나 부요한 자들은 우대해 줍니다. 오늘 본문 20절 말씀이 바로 이 내용입니다. “(잠 14:20) 가난한 자는 그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나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 가난한 자들은 그 이웃들에게까지도 미움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웃’이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친구’를 의미합니다. 가난한 자는 그 친구들도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부요한 자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친구가 되려고 합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나 성격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돈과 재물 즉 부요함 하나만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는 척도로 삼는 물질숭배사상과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이 세대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한국에서 백화점에 갈 때는 옷과 가방은 고급 명품으로 꾸미고 가야, 백화점 점원에게 무시 받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점원들도 값비싼 제품이나 물건을 소비할 재력이 없는 가난한 자를 무시하고, 반대로 재력이 있는 손님들은 VIP대접을 따로 해줍니다. 이와 같이 가난한 자를 홀대하고, 부자들을 우대하는 모습은 백화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퍼져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와 같이 사람의 소유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놓고, 사람을 차별하고,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에 대해서 성경은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잠 14:21) 그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 부요한 자가 있으면 곁에서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하고, 가난한 자가 있으면 깔보고 무시하는 태도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악입니다. 우리 사회가 부자들을 선호하고 빈곤한 자를 업신여기지만, 우리 그리스도들인들은 그와 같이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부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으셨습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그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눠주고 그의 삶을 구제하고 윤택하게 만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와 같이 살아가는 자가 하나님께 복을 받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떠올려봅시다.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자비하신 것과 같이, 우리들도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고 긍휼히 여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주님은 병든 자, 힘 없는 자,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사회적 약자들이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과 같이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긍휼을 베풀라는 주제는 잠언 14장 31절에도 반복됩니다. “(잠 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과 태도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나타납니다. 가난하고 연약한 자를 괴롭히고 무시하는 것은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힘 없는 이웃들을 돌보고 불쌍히 여기는 자들은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경외함을 그들의 행위로 나타냅니다.
2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잠 14:22) 악을 도모하는 자는 그릇 가는 것이 아니냐 선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인자와 진리가 있으리라” 이웃을 헤치기 위하여 악을 꾀하는 사람들, 음모를 꾸미는 자들은 잘못된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는 길은 멸망과 심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22절에 “악을 도모하는 자는 그릇 가는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릇 간다’는 것은 ‘비틀 거리는 것이 아니냐?’,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 아니냐?’는 뜻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타인을 헤치려 하거나 피해를 주려고 악을 꾸미는 자들은 그들이 추구하는 바를 끝내 이루지 못하고 비틀거리고, 헤매며, 방황하는 실패자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22절에 ‘선을 도모하는 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며, 경건하게 살아가는 자를 뜻합니다. 타인을 향한 자비심을 갖는 것 역시 선을 도모하는 자의 특징입니다. 이처럼 선한 것을 생각하고 계획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를 받고, 그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진리를 얻게 됩니다.
23절을 봅시다. “(잠 14:23)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어도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니라” 지혜로운 자의 특징은 땀 흘려 수고하고 성실히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혜자의 수고에는 보상이 따라옵니다. 그러나 땀 흘려 일하기 싫어하고 타인만 욕하고 거짓과 술수만 쓰는 게으른 자의 입술은 결국 그를 가난하게 만들 뿐입니다. 타인을 욕하고 비난하는 말만 많이 하고, 정작 자기 자신은 땀 흘려 일하지 않는 미련한 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2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잠 14:26)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먼저 상반절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다”고 했습니다. “견고한 의뢰”란 ‘언제든지 믿고 신뢰할 만한 의뢰자’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어떤 문제이든지 믿고 맡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흔히 우리가 사는 세상이 ‘광야’ 같다고 말합니다. 나 혼자 힘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혹독한 세상입니다. 언제 어디서 세상 위험 요소들이 우리의 생명을 빼앗아갈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런 험난한 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견고한 의지할 대상이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안전하고, 주께 기대는 자는 실족하지 않습니다. 하반절을 보면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살아가는 자는 그들의 자녀들까지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친히 그들의 견고한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이어지는 27절에서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받을 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잠 14:2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 되십니다. 따라서 그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는 사망의 그물 곧 죽음의 함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죽음의 그물도 두렵지 않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죽음도 이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우리의 삶 속에서 이웃을 대하는 태도로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가난한 자, 연약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것, 맡은 일에 성실하게 땀 흘리며 살아가는 것과 같이 일상 속에서 주를 향한 우리의 마음은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주를 경외하며 살아가는 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고, 주의 은총 아래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와 같은 복된 삶을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맡은 일에 성실하게 살아가는 하루가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