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18 혼인 잔치의 비유 (마태복음 22장 1-14절)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대해서 설명하시기 위해 결혼식 잔치를 여는 한 임금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등장하는 왕은 하나님을, 그의 아들이자 결혼하는 왕자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아들의 결혼을 맞아 왕은 손님들을 초대하기 위해서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눈 여겨 봐야 할 한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3절에 “그 청한 사람들을” 이란 표현입니다. 본래 이 당시 유대 사람들의 문화권에서는 연회를 위해서 초대를 1번이 아니라 2번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왜 연회는 한 번인데 초대는 두 번이나 해야 했을까요? 첫 번째 초대는 손님들이 연회에 참여할 것인지 의향을 묻기 위한 것입니다. 두 번째 초대는 이제 연회가 모두 다 준비 되었으니 참석하라고 알리는 의미의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에서 “그 청한 사람들”이라는 말은 이들이 이미 왕의 첫 번째 초대를 받고 “참석하겠습니다”하고 참여 의사를 밝힌 자들임을 의미합니다. 왕은 이들의 참석 의사를 따라 산해진미의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노래, 눈을 즐겁게 하는 화려한 잔치를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잔치가 다 준비되어 오라고 부르니, 초청 받은 자들이 오기를 싫어합니다. 정성 들여 혼인 잔치를 준비한 왕 입장에서 보면 화가 나고 기가 막힌 상황입니다. 그래도 왕은 다시 한 번 종들을 시켜 초대 받은 손님들을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4절을 보시면 또 하 번 “청한 사람들”이란 표현이 등장합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두 번의 초대 중, 첫 번째 초대에 혼인 잔치에 참석할 의사를 밝힌 사람들 입니다. 왕은 종들을 보내어 그들에게 소와 살진 짐승을 잡았고 모든 것을 다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라고 청했습니다. 소와 살진 짐승 요리는 당시 부유층들이 먹던 음식입니다. 왕이 매우 성대한 잔치를 준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잔치에 오라고 청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임금입니다. 왕입니다. 얼마든지 오라고 명령을 내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원하는 자들이 올 수 있도록 초대하였고, 그들도 오겠다고 대답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잔치가 다 준비 되니 이들은 오기를 싫어하셨습니다. 5절을 보니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왕의 초대를 ‘하찮게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초대를 한 이가 왕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한 사람은 밭에 나가 농사 지으러 갔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장사하러 갔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왕이 보낸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심지어 죽여 버렸습니다. 이 소식이 왕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왕이 얼마나 화가 났을까요? 곧바로 군대를 보내어 종을 살인한 자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그들이 사는 동네를 불태워 버렸습니다.

임금이 보낸 종들을 무시하거나 잡아 죽인 사람들과 같이 예수님의 천국 잔치를 사람들이 거절하는 모습은 크게 두 가지 입니다. 어떤 이들은 복음의 초대를 무시합니다. 또한 어떤 자들은 복음의 초대를 전하러 온 사람들을 욕보이고 잡아 죽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천국 잔치로 인도하는 전도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무시하고, 전도자들을 핍박하고 있습니다. 혼인 잔치 초대를 거부한 자들을 임금이 군대를 보내어 잡아 진멸한 것과 같이 예수님의 천국 초대를 무시한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심판입니다. 결국 저들은 심판 때에 지옥에 들어가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처음 혼인 잔치에 먼저 초대 받은 이들이 오기를 거부하자 왕은 군대를 시켜 그들을 다 진멸 시켰습니다. 그러나 아직 많은 음식이 남아 있습니다. 혼인 잔치인데 사람이 없어 분위기가 썰렁합니다. 이에 왕은 종들을 시켜 길거리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초대하여 오게 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에 10절 말씀을 보니, 종들이 길거리에 가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구별하지 않고 만나는 대로 모든 사람들을 다 혼인 잔치에 데려 갔습니다. 여기서 악한 자와 선한 자라는 것은 사회적 신분, 명성, 도덕성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것은 천국이 사람의 사회적 신분, 그의 도덕적인 삶의 수준으로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당시 악질의 죄인이라 정죄 받던 세리와 창녀들도 예수님을 만나 회개하고 구원을 받은 것처럼, 천국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혼인 잔치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열려 있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가난한 자와 부자, 악한 자나 선한 자 모두를 포용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줍니다. 누구든지 왕의 초대를 듣고 응답하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이로 인해 비어 있던 혼인 잔치 자리가 금새 손님들로 북적 였습니다. 이 때 혼인 잔치에 참여한 손님들을 보던 왕은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왜 우리가 장례식에 참여할 때는 검정색 옷을 입지 않습니까? 장례식장에 가는데 빨간 옷이나 무지개색 양말을 신고 간다고 생각해 봅시다. 유족들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이처럼 혼인 잔치나 장례에는 그에 걸맞는 예복이 있기 마련입니다. 어떤 예복이었을까요? 혼인을 축하하는 자리이기에 누추하고 더러운 옷은 안 됩니다. 이것은 주인을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아무리 공짜로 초대 받은 자리이지만,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의 아들이 결혼하는 자리입니다. 어찌 그냥 갈 수 있겠습니까? 다른 손님들은 예복을 갖추고 혼인 잔치에 참여 하였으나 이 사람은 예복을 입지 않고 왔습니다. 이에 12절에 왕이 말합니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했습니다. 임금은 종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저 예복을 입지 않은 자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왕은 예복을 입지 않은 자를 혼인 잔치에서 내쫓았습니다. 왕의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았으면 그에 맞은 예복을 갖춰 입었어야 했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는 천국에 대한 비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우리들도 언젠가는 하늘에서 열리게 될 어린 양 예수님의 혼인 잔치에 들어가게 됩니다. 신랑은 예수님, 신부는 그의 교회 즉 성도들입니다. 결혼식 하는 신부가 입는 옷은 무엇입니까? 순백의 웨딩 드레스 입니다. 그럼 여러분 예수님의 혼인 잔치에 입고 갈 예복 준비 하셨습니까? 어디 가서 돈 주고 예복을 살 수 있을까요? 어느 장인에게 부탁하면 천국 혼인 잔치에서 입을 예복을 맞출 수 있을까요? 이 예복은 돈으로도 살 수 없고, 아무리 발품을 팔고 노력해도 살 수 없는 옷입니다. 그렇다면 천국 잔치에 들어갈 예복은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요? 성경 말씀을 3군데만 살펴보겠습니다.

 

[슥3:3-4] 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

 

[갈3:26-27]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계19:7-8]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천국 잔치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예복은 ‘의로움’입니다. 이 의로움은 우리의 의가 아닙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이 아무리 의롭게 살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하나님 보실 때 우리의 의는 더러운 걸레 조각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입어야 하는 의로움은 누구의 의 입니까? 우리 더러운 죄를 씻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 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바로 우리의 죄사함을 위한 대속의 죽음임을 믿고 고백하는 믿음의 행위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게 합니다. 그럼 이제 예수님의 의가 있으니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면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의면 충분하니 우리의 선한행실으 아무런 의미가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웨딩 드레스를 입은 예비 신부가 드레스 입고 빨간 고추장이 들어간 비빔밥을 먹는 것을 보셨습니까? 빨간 김치 먹는 것을 보셨습니까? 아무리 평소에 비빔밥 좋아하고 김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예비 신부방에서 눈을 씻고 찾아봐도 이 둘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왜요? 드레스에 고추장 튀기면 재앙입니다. 김치 국물 튀기면 눈물 납니다. 신부는 가장 순결함과 정결함을 상징하는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등장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며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 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의 의로 우리에게 구원의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우리를 천국으로 불러 주신 주님의 신부로서 정결하고 순결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