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07 두려움을 이겨내는 믿음 (누가복음 8:40-56)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있습니다. 그는 간절한 목소리로 울부짖으며 예수님께 한 가지를 구했습니다. “예수님 우리 집에 와주십시오! 제 하나 밖에 없는 딸아이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백부장 야이로는 자신의 사회적 체면, 내면의 자존심도 다 내려놓고, 오직 딸을 살리기 위한 아버지의 심정으로 지금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었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 그리고 그 밖에도 그가 행하신 많은 기적들을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야이로의 딸은 바람 앞에 흔들거리는 촛불처럼 목숨이 위태로웠습니다. 마침 야이로는 예수님께서 이 마을에 계심을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야말로 죽어가는 자신의 딸을 살리는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 생각하고 이처럼 길거리로 뛰어나와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있는 것입니다. 41절을 보면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서 간구하다는 말은 차분한 목소리로 일회 “주님… 저희 집 와 주시겠습니까…”하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예수님 제발 저희 집에 좀 와주세요! 제발 오셔서 제 딸 좀 살려주세요!” 하고 간절하게 예수님께 매달린 것입니다.

믿음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주님이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아브라함 보세요. 75세 때 그를 부르시면서 너는 큰 민족의 아비가 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에게 많은 후손이 태어날 것을 말씀하시는데 세월이 25년 흐르도록 자녀가 없었습니다. 100세가 되었는데도 아브라함의 믿음은 변하지 않았어요. 이것이 위대한 믿음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상황이 바뀌고 어떤 어려움이 다가와도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꼭 붙잡고 나아가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시간 교회에 나아온 것은 예수님을 만나로 나온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집에도 계시고 교회 밖에도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더 가까이에서 만나기 위하여 이 시간 교회에 나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바로 믿음으로 나아오는 사람입니다. 문은 그 앞에 사람이 서 있는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열리지 않습니다. 오직 그 문 안에 계신 주인이 열어줄 것을 기대하고 믿는 마음으로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문을, 축복의 문을, 치유의 문을 열어 주실 것을 기대하고 믿는 마음을 가지시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던 길을 멈추고 잠시 지체하는 사이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왔습니다. 그리고 아파하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49절에 그들은 말했습니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선생님께 더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왜 야이로 집의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 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어가는 병든 사람은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죽은 사람은 살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사람만 고칠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이 가진 믿음의 한계였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이미 딸이 죽었으니 야이로를 향하여 더 이상 예수님께서도 어찌할 수 없는 이 문제를 가지고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 것이죠.

야이로 집 사람들은 믿음의 한계선을 긋습니다. 하나님은 여기까지만 도와 주실 수 있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그 이상은 하나님이라도 도저히 도와 주실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만, 실제적으로는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는 불가능의 영역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들도 내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해서 믿음의 한계선을 긋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에 대한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조련사들이 어떻게 집채 만한 코끼리가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게 할 수 있었을까요? 조련사들은 코끼리가 어렸을 때 발목에 코끼리가 끊을 수 없는 단단한 쇠사슬을 걸어 놓고 나무에 걸어 놓습니다. 그러면 새끼 코끼리들은 도망치려고 몇 번이나 시도해보다가 “이 줄은 내 힘으로는 절대로 끊을 수 없구나 안되나 보다” 하고 포기합니다. 그러한 생각의 틀이 자리잡게 되면 집채 만하게 다 자란 어른 코끼리가 되어 그 줄을 묶고 있는 나무를 부수고 도망갈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줄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아”하고 똑같이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코끼리의 한계선입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한계선은 어디입니까? 우리들도 신앙생활 하다 보면 이 야이로의 집안 사람들처럼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지금 내가 힘들어하고 있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또한 만약 어떠한 상황이나 문제가 내가 기도하던 대로 되지 않았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한다면 여전히 하나님께서 그 기도대로 되지 않은 상황 가운데서도 여전히 나를 도우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는 증거가 됩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문제들 뿐만 아니라, 그 문제가 내가 원하던 대로 해결되지 않아, 더 어렵게 되고 힘들게 되어버린 그 최악의 상황들 까지 간다해도 여전히 믿음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한계선을 뛰어넘어 더 큰 믿음을 가지시길 원하고 계십니다.

야이로 역시 자신의 믿음의 한계선 위로 가는 상황에 처하였습니다. 병든 딸을 고치는 예수님은 믿었지만,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은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가 딸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야이로는 얼마나 큰 절망에 빠졌겠습니까? 예수님이 자신의 마지막 희망이라 생각하여 회당장으로서 자존심도 다 버리고 그 앞에 무릎 꿇고 나와 자기 집으로 와 달라고 요청했고, 예수님께서도 기꺼이 그의 집으로 함께 가 주시겠다고 말씀하셔서 병든 딸을 고칠 마지막 희망인 예수님을 모시고 가고 있는 그 길에 딸 아이의 사망소식이 전해졌으니 야이로는 주체 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흘리며 절망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아이고, 내 딸이 죽었네. 이제 어떡하지.” 아마 털썩 주저 앉았을지 몰라요. 이렇게 절망은 예고 없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와서 우리를 낙심시키고 우리를 주저앉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때 주저앉으면 안돼요. 그 때 포기하면 안돼요. 예수님 옆에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만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역사의 시작인 것입니다. 인생엔 절망이 있어도 하나님 안에선 절망이 없습니다. 인생의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되고, 죽음이 변하여 생명이 되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절망에 빠진 야이로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8:50)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오늘 성경이 예수님과 야이로의 만남을 통해 주시는 말씀의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저를 따라해 보시겠습니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자” 여기 있는 우리 중에 실수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문제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사람은 다 저마다 문제가 있고 고민이 있고 넘어질 때가 있고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에게 하셨던 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고 계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오늘 이 약속의 말씀은 조건절이라는 것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다른 것이 아니라 그의 믿음을 보길 원하셨습니다. 성경에 야이로의 대답이 나와있지는 않지만, 그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간 그 행위에서 우리는 그의 대답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했으면 딸이 죽어 있는 집으로 모시고 갔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야이로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그가 가장 사랑했던 딸이 죽어버린 자신의 집으로 갔습니다. 이미 동네 사람들이 모여 그 아이의 죽음으로 심히 슬퍼하고 울며 통곡하는 소리가 집 밖에까지 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집에 도착하신 후 이들에게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기가 차고 하도 어이가 없다는 모습으로 예수님을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이들 역시 예수님께서 죽은 이를 살릴 수 없다는 믿음의 한계선에 갇힌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다 밖으로 보내시고 오직 아이의 부모와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을 데리시고 딸 아이가 누워 있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손을 붙잡고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아람어로 말씀하셨습니다. “달리다쿰!” (“Talitha koum!)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러자 곧 죽었던 소녀가 다시 살아나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녀는 걸어 다니기까지 했습니다. 야이로가 믿음으로 끝까지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오자, 죽었던 그의 딸이 예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났습니다. 딸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두려워하지 않고 믿기만 하여 죽은 딸을 다시 얻은 회당장 야이로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그 어떠한 상황과 문제 앞에서도 “두려워 말라 믿기만하라!” 말씀 하고 계신 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