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위치한 프랑스는 전 세계 사람들이 꿈꾸는 예술과 낭만의 도시입니다. 해마다 수 백 만명의 관광객들이 프랑스를 찾아옵니다. 지난 2016년 자료에 따르면 프랑스를 다녀간 관광객 수가 한 해에만 8천 2백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같은 해에 미국을 다녀간 관광객 숫자는 8천 백만명으로 프랑스를 찾은 관광객이 미국을 찾은 사람의 숫자보다 무려 백만명이나 더 많았습니다. 2013년부터 2016년까지 명실공히 프랑스는 전세계에서 관광객이 제일 많이 찾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역사를 간직한 건물들과 길거리 그리고 화려한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을 자랑하는 프랑스이지만, 그 이면에는 관광객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소매치기 였습니다. 관광객들의 두 눈이 예술작품을 감상하거나 도시의 풍경에 빠져 있는 동안 재빠르게 지갑이나, 물품, 옷가지들을 소매치기들이 훔쳐 달아났습니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율이 해마다 올라가자, 프랑스 정부는 이것이 관광객들의 발길을 끊을까 염려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수 년전부터 프랑스 정부는 관광객들이 많이 다니는 길거리에 서 있는 가로등 마다 CCTV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래서 소매치기 신고가 들어오면 경찰이 CCTV 화면을 분석해서 범인을 잡아내는 일이 뉴스에 소개되었습니다. CCTV를 다 설치 해 놓으니까 그 결과 범죄율이 무려 40%가 떨어졌습니다. 미국이야 땅이 워낙 커서 비교적 어려운 일입니다만은, 요즘 한국도 놀이터, 학교 입구, 지하주차장 등 곳곳마다 방범용 CCTV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한국 역시 통계를 보니 CCTV가 설치가 되어 있다고 표시 해둔 구역에서는 눈에 뛰게 범죄율이 줄어들었습니다. CCTV는 프랑스와 한국에서 둘다 범죄율을 줄이는데 큰 공헌을 한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은 인간의 마음에 있는 한 가지 단면을 깨닫게 합니다. 사람들은 제 3자가 자신이 죄를 짓거나,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행위를 잘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방이 훤히 다 들여다보이는 낮보다는 어두운 밤 사람이 한적한 뒷 골목길에서 무시무시한 범죄들이 저질러 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군가가 나를 감시하고 있다는 인식을 받게 되면, 도덕적으로 올바른 선택과 행동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지게 됩니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신앙생활에서도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경우에도 누군가 나를 지켜보는 사람이 있으면 죄를 잘 짓지 않습니다. 상대편으로부터 정죄를 당할까 두렵고,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 창피하여 죄에 대항하는 일 하기를 꺼려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보는 이 없고 혼자 있을 때는 다릅니다. 교회에서는 가장 거룩한 모습으로 신앙생활하지만, 홀로 있을 때는 술, 담배, 욕설, 폭력, 음란행위 등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교회 다니는 한 학생이 일기에 이렇게 썻습니다. “우리 아빠는 교회에서는 저렇게 온유하고 착하신 분인데 왜 집에만 오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시는 것일까? 아빠는 가식 덩어리야… 아빠는 위선자야. 교회 가서는 그렇게 권사님들, 집사님들에게는 생글생글 웃으며 잘 이야기 하면서 왜 집에 와서는 엄마에게 저렇게 언성을 높이고 욕을 하고 함부로 대하실까?”
사람은 누구나 나를 평가하는 타인의 시선이 가득하거나 내가 주목 받고 있는 자리에서는 최대한 고상하고 멋지고 훌륭한 모습을 보이려 애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남들이 보지 않는 가까운 관계, 누군가를 의식할 필요가 없는 일상에서는 우리 성품들이 있는 그대로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우리의 진정한 인격이 드러납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나타나는 내 신앙생활이 내 믿음의 수준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일주일 동안 살아가는 모습을 카메라로 촬영해서 이번주 주일날 교회 전체 교인이 보는 앞에서 상영한다고 가정했을 때, 내가 지난 한 주를 살아온 그대로 아무런 변화없이 보여줘도 괜찮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신앙생활을 할 때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이 보던지, 내 주변에 아무도 없든지 늘 한결 같은 사람입니다. 집에서 아내와 자녀들이 아는 내 모습, 직장에서 동료들이 보는 내 모습, 교회에서 장로님 집사님이 아는 내 모습, 나 홀로 남겨졌을 때의 모습이 똑같습니다.
오늘 빌립보서를 기록한 사도 바울은 한 가지 걱정이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자기가 함께 있을 때는 신앙생활 잘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멀리 로마 감옥에 갇혀 그들과 함께하지 못하고 있을 때는 ‘저들이 또 다시 신앙생활이 완전히 무너져서 옛 습관대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하고 바울은 염려했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시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항상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여러분과 함께 있는 동안, 여러분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태도를 잘 보여 주었습니다. 내가 곁에 없을 때,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두려움과 떨림으로 늘 힘쓰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성도들 곁에 있든지 없든지 항상 동일하게 열심히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라고 권면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철저하게 훈련해 가야 할 중요한 자세가 바로 “일관성” 입니다. 다른 사람들ㅇ 보든지 안 보든지, 다른 성도가 보든지 안 보든지 일관성 있게 열심을 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열심을 내어 협조를 잘 하고 있다가, 그 사람이 없으면 태도가 달라지는 것은 자신의 신앙이 미성숙하거나,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생활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것부터 버려야 합니다. 절대로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신앙생활하지 마십시오. “내가 이렇게 기도하면 저 사람이 나를 거룩하게 보겠지.”하고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 받으려고 신앙생활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신앙생활 하면 결국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게 됩니다. 또한 자신의 신앙도 결코 자라지 못합니다.
12절에 사도 바울은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가짜 신앙생활, 껍데기 신앙생활이 아니라, 진짜 생명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가장 먼저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목회자나 다른 성도들이 없어도, 오직 하나님 앞에서 봉사하고 섬기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 12절에 한 가지 주목해보고 싶은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마지막 3 단어 입니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 말을 한 번 깊게 생각해 봅시다. 이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받은 것 아닙니까? 그럼 어째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구원을 이루라’고 말한 것일까요? 이것을 한 번 쉬운 예로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럽에 위치한 독일은 한 때 동독과 서독, 이렇게 두 개의 나라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독과 서독은 이 다음해인 1990년에 통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예전에는 서방 국가들이 ‘동독’, ‘서독’ 이렇게 불렸던 국가가 엄연한 하나의 국가로 ‘독일’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독일이 통일한 지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통일을 기념하는 날이 되면 독일 각 신문의 사설과 칼럼들에 다음과 같은 주제로 글이 실리곤 합니다. “독일, 과연 통일은 되었는가?”
왜 이런 글이 올라올까요? 행정적으로 ‘서독’과 ‘동독’은 오랜 세월을 걸쳐 천신만고 끝에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 통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면을 깊숙하게 보면 독일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여전히 ‘동독’과 ‘서독’ 두개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시민들은 ‘독일이 진정 통일 국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했습니다. 겉으로는 독일로 통일이 되었지만, 서독과 동독이 큰 경제난과 높은 실업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동독과 서독 사람들은 서로 문화의 이질감을 느끼며 하나되지 못하고 부작용이 일어났습니다. 그 홍역이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못하고 독일 사회를 힘들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일이라는 나라는 통일은 되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통일 국가가 되기까지는 아직도 험난한 길을 가야 합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구원을 이루라’는 의미가 꼭 이와 같습니다. 과거 어느 날 우리 인생의 한복판에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죄로 어두웠던 우리의 마음의 눈을 여시고 완악했던 마음을 부드럽게 녹여 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고백하게 되었고,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던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세주로 가슴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구원은 우리에게 단 한 번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구원은 되풀이 되지 않는 일회적 사건입니다. 간혹 부흥회 때마다 예수님 다시 영접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것은 구원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건이 바로 구원입니다. 이것은 단번에 일회적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구원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가 이제 구원을 받은 자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살아가야 할 성화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직 우리에게 도래하지 않은 진정한 구원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 구원 받은 자로서의 완전무결한 거룩한 삶이 오늘도 우리에게 성화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동독과 서독이 독일이라는 통일국가가 되었음에도 진정한 의미의 통일국가가 되기 위해서 여전히 하나가 되어가고 있는 과정처럼 우리의 구원도 구원 받은 자의 합당한 모습으로 빚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12절에서 “구원을 이루라!”고 한 말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었다고 해서 한 순간에 우리의 성격이 변화하고, 모든 것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방언기도도 하고 사랑이 넘치고 얼굴에 광채가 나는 삶으로 바뀐 것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자신의 아내 사라를 여동생이라고 속이는 거짓말을 했고, 아들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지 못해 사라의 여종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아브라함에게도 거짓과 불신의 요소는 완전하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분명 하나님의 자녀였지만, 밧세바와 간음을 저질렀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서 그의 남편이자 자신의 충신인 우리야를 죽였습니다. 구원을 받았으나 여전히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은 살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다워지는 것은 점차적인 과정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아브라함의 삶을 깊게 들여다 보겠습니다. 창세기 15장을 보면 하나님은 자식이 없던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에 모래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 일흔 다섯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자식이 생기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을까봐 초조해하고 걱정하다가 아내 사래의 말에 넘어가 하갈을 통해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 때부터 무려 1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께서 긴 침묵을 깨시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처음 하신 말씀이 바로 창세기 17장 1절 입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이 말씀을 조금 이해하기 쉽게 해석 하면 이것입니다. “아브라함! 네가 정말 내 자녀가 되었으면 나를 신뢰하고 기다렸어야 하는 것 아니냐? 너는 이제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한 믿음을 보여라!” 하나님으로부터 질책과 책망을 들은 아브라함… 그의 삶에는 이런 긴 기다림과 연단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2장에 가서는 그토록 힘들고 어렵게 기다려 얻은 아들 이삭, 자기 목숨보다 귀한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오랜 세월 하나님의 연단에 깎이고 다듬어진 아브라함은 어떻게 합니까? 이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전혀 따지거나 원망하지 않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아들 이삭과 함께 삼일 길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모리아 땅에 있는 산에 올라가서 아들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 그 날카로운 칼을 뽑아서 찍어 내리려고 손을 들자 하나님께서 그를 급하게 부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앞서 창세기 15장에서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전혀 신뢰하지 못하는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22장에 와서 아브라함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서 모든 일이 잘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엄청난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마치 원석을 다듬어 보석이 나오듯이, 고난 속에서 아브라함의 영혼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빛나는 믿음을 이루어 냈습니다. 사람은 결코 고난 없이 하나님 앞에 다가갈 수 없는 존재 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조차도 하나님의 크신 섭리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12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구원을 이루는데 어떤 마음으로 합니까? ‘두렵고 떨림으로…’ 여기서 말하고 있는 감정은 우리가 공포영화를 보거나 귀신 이야기를 들을 때 느끼는 그런 두려움과 떨림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랑에서 나오는 조심스러움을 뜻합니다. 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면 행동거지 하나 함부로 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하지 않습니까? 장난기 많은 중학생 아이도 자기가 좋아하는 여학생이 그 앞을 지나가면 갑자기 조심스러워 집니다. 가능하면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흠이 안 잡히길 원하고 단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을 의식해서 언행이나 생각이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주님을 사랑하기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임재의식이 있는지 늘 내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1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여기서 ‘행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네르게인’입니다. 웬지 낯이 익지 않습니까? 영어의 Energy가 여기서 파생된 단어 입니다. 에너지 곧 행동하는 힘 입니다. 따라서 13절 말씀에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주님의 의도와 목적과 뜻을 가지고 행동하시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붙잡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되도록 우리 삶 속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키울 때 보면, “낳아주는 것도 힘들었다. 이제 그냥 너 혼자 알아서 커라.” 하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녀를 바라볼 때 마음에 소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 자녀에게 음악적 소질이 있다면 소원을 가지고 음악을 마음껏 공부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려고 애를 씁니다. 돈이 모자르면 자신이 허리 띠를 졸라매도 밤 늦게까지라도 일을 더해서라도 레슨비를 마련해 주고 싶은 것이 자식을 향한 부모의 심정입니다. 특별히 부모 중에 자녀가 운동을 하거나 음악을 하거나 미술을 하는 자녀를 둔 부모는 희생이 많습니다. 그 한 자녀 잘 되라고 오랜 세월 인내하며 뒷바라지 합니다. 자식이 잘 되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처럼 부모는 소원을 두고 자녀를 키웁니다.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소원을 가지고 우리를 키우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이 세상 부모들의 방법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항상 평안하고 행복한 환경 속에만 있으면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을 것 같은 광야로 데려가십니다. 그곳에서 고난을 겪으며 머리 속 논리고 이성이고 채면이고 다 던지고 “하나님 나 좀 살려주세요!”하고 하나님께만 매달리기 시작 할 때 하나님께서 손을 내밀어 주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광야의 경험,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배워가게 됩니다. 자녀가 고난 당하는 것을 보고 가슴 아프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빌 2: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원망은 다른 말로 하면 불평입니다. 원망의 뿌리에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 있습니다. 먄약 지금 내가 일련의 일어나는 일들과 벌어진 상황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불신다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을 때 누군가를 탓하거나 원망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신뢰하기고 순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 안에 하나님의 놀라운 평안과 기쁨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왜 사도 바울은 12절에 “구원을 이루라”고 14절에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하라”고 했을까요? 구원을 받은 자는 반드시 광야학교에 입학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나니 마실 물이 없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애굽 나오면 바로 가나안 갈 줄 알았는데 그 사이에는 죽음의 땅 광야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가 걸어가야 할 땅이 바로 광야 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훈련계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 없이 자발적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원 받은 백성들에게 주님의 거룩하심과 아버지 되심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풍성함을 삶으로 경험하게 하시기 위해 광야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인생이란 광야를 통과하며 하나님의 온전한 백성으로 성숙하게 만들어 가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15절 말씀에 하나님의 이 놀라운 계획이 고스란히 적혀 있습니다. “(빌 2: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5절을 보니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와 같은 척박한 삶의 길로 몰아넣으시는 의도를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홈 없고 순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순전하다’라는 표현은 불순물들이 섞이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헬라어로 봄면 본래 이 단어는 “물을 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이 글을 쓴 당시에 포도주 만드는 산업이 성행했습니다, 포도주의 가치는 순도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포도주에 물올 탈수록 가치가 떨어집니다. 그래서 ‘순전하다’라는 이 표현은 어떤 것이 일절 섞이지 않은 가치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다른 것이 들어가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만으로 가득 차 있는 순전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광야의 길로 인도하시는 두 번째 이유는 세상 속에서 빛으로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15절에 사도 바울이 ‘빛’이라는 단어를 쓴 의도를 이해해야 합니다 빛은 환한 불빛이 있는 곳에서는 필요가 없습니다 어두운 곳에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왜 불순물을 뽑아내는 훈련의 과정을 통해서 빛 된 자녀로 만들어져야 될까요? 이 세상이 너무나 어둡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의 어두움을 물러가게 하는 빛의 자녀로 쓰시기 위해 우리를 고난올 통해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아픔을 경험해 본 사람이 아픈 사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인간 관계 때문에 고통을 당해 본 사람이,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을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두운 데 들어가 빛을 비추라고 부르셨습니다
마지막으로 16-18절을 보겠습니다. “(빌 2: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빌 2: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빌 2: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바울은 자신을 제물로 표현했습니다. 제물은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쓰여지고 드려져야 가치가 있는 것이 제물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광야의 인생길을 가는 동안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병사들을 어려운 훈련을 통해 강한 병사로 만드는 이유는 전쟁에 내보내기 위해서입니다. 생사가 오고가는 전투의 현장을 위해 훈련 받지 못하고 준비되지 않는 병사는 전쟁터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삶 역시 바울처럼 관제처럼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 이타적인 인생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이 세상에 실어 나르는 통로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들은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이미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현재 우리의 삶 속에서 더 완전한 구원을 이루어 가야합니다. 구원받은 자로 합당한 모습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비록 그러한 과정이 광야와 고난의 길이라도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광야에서의 모든 훈련을 통과한 우리들은 하나님을 위해 살고 서로를 섬기며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복된 삶 성숙한 삶이 우리 안에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