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3.9. 한계 없는 용서 (마태복음 18장 21-35절)

대한민국의 약사 출신이며 동시에 트로트 가수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주현미라는 분이 계십니다. 하루는 그녀가 TV에 출현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습니다.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저지른 실수 중에 가장 큰 실수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 인생 최고의 실수는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어린 시절 돈을 벌기 위해 해외로 나가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그녀는 졸지에 소녀가장이 되어 동생들을 챙기며 하루하루 힘겨운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끝을 모르는 힘든 시간들을 버티다 보니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싹텄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원망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아버지가 미웠던지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손주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방송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자신이 용서 되지 않는 부분이다. 그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 몰랐다”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지금은 비록 옆에 없으나 노래 잘 한다고 믿어줬던 아버지에게 감사하고 아버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고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딸도 아버지를 한 평생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어쩌면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용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아와 용서에 대한 질문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 됩니다. “주님, 형제가 내게 죄를 지었을 때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오늘 베드로의 질문 가운데 우리가 자주 놓치는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형제’라는 단어 입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사용한 ‘형제’라는 단어는 같은 하나님을 믿는 영적 형제를 의미합니다. 즉 우리와 같이 같은 교회 식구 혹은 신앙의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질문을 바꾸면 다음과도 같습니다. “주님, 김 집사님이 제게 죄를 지으면 제가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할까요?” 베드로는 그래도 예수님께 잘 보이고자 이렇게 말합니다. “일곱 번까지면 되겠습니까?” 베드로는 완전수인 7을 사용하여 ‘예수님 일곱 번이면 충분히 용서한 것이죠?’하고 주님께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곱 번 용서해 주는 것이면 많은 건가요? 작은 건가요?

사실 한 사람에 대하여 ‘일곱 번’ 용서해 준다는 것은 대단한 인내심을 필요로 합니다. 참을 인자 셋만 새기는 것도 쉽지 않은데 일곱 번 용서해 준다니 그 사람은 성인군자입니다. 아마 베드로는 속으로 뿌듯해 하며 예수님의 칭찬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상치 못한 답변을 주셨습니다. (1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아니 베드로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 용서하고 또 그와 같이 일곱 번 용서하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셈을 따져보면 70×7 = 490번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특정한 수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완전수 7과 7을 곱한 것으로 완전히 끝까지 용서하라는 의미가 됩니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계속해서 누군가의 죄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일만 달란트라는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백데라니온을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예화를 들어 주셨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용서 받은 자임을 보여 줍니다.  일만 달란트라는 액수는 절대로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빚을 다 용서하시고 탕감해 주셨습니다. 무조건적 은혜입니다. 죄를 탕감 받을 만한 근거나 조건이 우리에게 있어서, 용서해 주신 것이 아니라, 아무런 자격이 없음에도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탕감 받고 용서 받은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우리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큰 은혜, 큰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 주어진 여러 관계가 있습니다. 부부관계, 이웃간의 관계, 성도들의 관계.. 우리가 살면서 서로 상처를 안 주고 안 받으면 너무 좋겠습니다만,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에 죄인과 죄인이 만나면 서로 상처를 주고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가장 가까운 배우자가 나에게 상처를 줍니다. 또 나도 배우자에게 상처를 줍니다. 나도 죄인이고 배우자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상처를 주고 받습니다. 부모도 죄인이고 자녀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고 사는 죄인들입니다. 

비록 여러 관계 속에 많은 문제가 있지만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회적인 윤리에 근거한 용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용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네가 받은 은혜를 생각하고 용서하라!’ 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연한 용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러한 관점에서 자기의 형제들의 잘못을 용서하는 본을 보였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총에서도 제외되고 육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많은 손해가 있습니다. 20여년간 용서를 연구한 위스콘신대학 심리학과 로버트 엔라이트 교수는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 이혼 위기에 처한 부부, 암환자, 심장질환자 등 다양한 이들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용서를 실천한 이들이 우울증에서 벗어나고, 병세가 호전되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 극적인 변화를 보였다고 한다. 또한 마약중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용서법을 배우고 실천한 이들이 기존 치료만 받은 이들보다 분노, 우울증, 걱정이 줄고 자부심이 높아져 재활치료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용서는 영적인 문제일뿐만 아니라 삶에 총제적으로 영향이 있을만큼 그 결과가 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용서 받은 자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은혜에 근거하여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면, 우리 자신도 하늘에서 용서 받지 못한다는 것도 주님은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혹시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혹시 그 사람은 내 가까운 가족입니까? 부모입니까? 형제입니까? 자녀들입니까? 아니면 교회 식구 입니까? 그 누구라도, 그 어떠한 일 때문이라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용서는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야 합니다. 중심으로부터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함께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