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3.8. 잃은 양을 위한 기도 (마태복음 18:11-20절)

 

오늘 본문 11절을 보면 “없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성경 사본들 중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진 오래된 사본들에서는 이 구절이 누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현대 번역본 성경들에는 11절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경 학자들은 아마도 이 구절이 누가복음 19장 10절 말씀을 힘입어 후대의 필사가들이 그 내용을 덧붙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용서하실 때 사용하신 말씀입니다. “인자는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기 위해 왔노라” 삭개오는 분명 잃어버린 자였으나, 예수님께서 그를 발견하시고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왜 예수님께서 삭개오 같은 죄인을 찾아가 그의 집에 머물며 함께 식사하는 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의문을 가지고 자신을 쳐다 보는 군중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바로 이 구절 ‘인자는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기 위해 왔노라”는 말씀을 들려 주신 것이죠.

그리고 오늘 예수님은 이어서 양 백 마리의 비유를 들려 주셨습니다. 어느 한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양을 백 마리 소유했다는 것은 그가 거부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중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백 마리 중 하나를 잃는 게 무슨 대수 입니까? 사실 중동에서 양 키우는 목자들 사이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늑대나 곰이 와서 잡아 먹기도 하고, 어리석고 근시안인 양이 길을 잃어 버려 무리에게서 낙오 되기도 합니다. 또한 길을 잘 못 들어 걷다가 구덩이에 빠져 죽기도 합니다. 한 마리 잃어도 양을 무려 99마리나 소유한 양 주인 입장에서는 한 마리 빠진 것이 대수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양 주인,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산에 두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길을 떠났습니다. 아마도 다른 목자들에게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을 맡겨 두었을 겁니다. 그리고 결국 그 잃은 양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은 목자의 기쁨은 산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나머지 99마리의 양이 준 기쁨 보다 더 크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99마리의 양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게 있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왕, 귀족들, 종교지도자들과 어울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난한 자, 병든 자, 귀신들린 자, 더럽기로 소문 난 자, 문둥병자, 앉은뱅이, 소경, 그리고 삭개오와 같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릴 자를 찾기 이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14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우리가 볼 때 작고 힘 없고 연약한 자들일 지라도 우리는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을 업신여기거나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존중해야 합니다. 형제들을 업신 여기는 것과 그들을 시험에 빠지게 하여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것은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목자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온 산들을 돌아 다니며 뒤질 만큼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듯이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작은 자들, 약한 자들 모든 신자들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자, 예수님은 다른 경우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려 주십니다. 15절부터 등장하는 이야기는 잃은 양이 다름 아닌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잘못을 저지른 경우 입니다. 15절에서는 죄를 범한 자를 ‘형제’라고 칭했습니다. 함께 하나님을 믿는 한 공동체 식구입니다. 예수님은 형제가 죄를 범한 경우, 범죄로 인해 피해를 받은 사람이 먼저 가서 그 사람과 만나서 권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형제에게 다가간 사람은 그를 바로잡을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노와 미움의 마음으로 형제에게 다가가는 사람은 그를 더욱 실족 시킬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죄를 범한 형제에게 가라고 하셨을 때, 이 모든 동기는 형제 사랑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누군가 나에게 잘못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흔히 예수님께서 권하신 것과 반대 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증오를 품고 분노하고, 돌아서서 복수 합니다. 때로는 뒤에서 험담하고 욕하고 조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록 그렇게 하는 일이 어렵다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서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될 때에야 비로소 관계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형제에게 갔음에도 그가 회개하지 않고 아무런 효력도 없다면, 이제는 두 번째 단계로 나가야 합니다. 이제는 한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과 함께 은밀하게 문제를 다시 해결하기 위한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예수님의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교회 내에서 관계적인 갈등이 일어나게 되면 우리는 갈등을 모르는 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처리해야 합니다. 인간 관계 가운데서 화평을 유지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큰 방 안에 불화와 다툼이란 이름의 코끼리가 들어와 있는데도, 코끼리가 없는 척, 못 본 척 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갈등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포기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해결될 때까지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또한 마지막으로 갈등을 풀어가는 것입니다. 갈등이 해소 되면 갈등을 떠나 보내고 거기에 얽매여 살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듣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교회에 말하고 그 사람을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법에도 분명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마지막 단계는 그 사람과 관계를 끊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교회 밖의 외인으로 간주 되어야 하고 성도의 교제에서도 제외 되어야 합니다. 18절 말씀은 교회의 권징의 효력을 말씀하십니다. 교회의 결정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때 우리의 결정은 현재 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그 효과가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교회가 합심하여 간구할 것을 권면하셨습니다. 이는 무엇에 대한 간구겠습니까? 문맥으로 보면 바로 잃어버린 영혼이 돌아오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형제는 죄를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실족한 형제들은 마음의 상처를 이겨내고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사랑의 마음으로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곳에 주님께서도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상처 입은 영혼, 실족한 영혼, 죄를 지어 떠난 영혼, 죄악에 빠진 영혼 우리가 기도해야 할 잃어버린 양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의 마음으로 영혼들의 이름을 주님께 아뢰며 그들이 다시 아버지 집에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