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3.22. 위선의 사람들 (마태복음 23장 1-12절)

마태복음 22장에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찾아와 어떻게든 그를 책잡고 끌어내리려 했습니다. 그들은 갖은 지혜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봤지만, 예수님을 책 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지혜가 그들의 지혜보다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3장은 바로 이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가 담겨져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을 보면 스스로 의롭고 경건하다고 자부하며 백성의 영적 지도자로 군림하고 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경계와 저주를 무려 36절이나 되는 긴 분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를 봐도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에 대한 주님의 저주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해 계십니다. 이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함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의와 경건의 잣대로 예수님을 비난하고 넘어뜨리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실상이 얼마나 불경건하고 불의한가를 파헤치며 말씀해 주셨습니다.

2절에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모세의 자리’란 모세의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고 백성들에게 적용하는 위치에 있는 말씀의 권위를 가진 신분을 가리킵니다.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해석하고, 모세처럼 법을 만들고 재판하는 자격으로 백성들 앞에 서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가리킵니다.

3절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저들이 말하는 것은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저들이 말하는 것은 모세의 율법만 해당 되는 것이지, 저들이 율법을 왜곡하여 만든 조상의 유전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모세의 율법을 잘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들의 삶과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이 말만 하고 자신들이 가르친 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는 부분은 인정하셨지만, 그들이 율법의 정신을 버렸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이율 배반적인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강력하게 촉구하셨습니다.

4절을 보면, “저들이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운다”고 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실 때 의도하지 않는 것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백성들에게 엄격하게 지키라고 강요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서 율법을 주셨는데, 종교 지도자들은 마치 율법을 위해서 사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대로 하나님께서 부과하지도 않은 것들을 지키느라 매우 큰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온갖 세부적인 지침들과 요구 사항들을 덧붙여서 일반인들이 율법을 지킬 엄두 조차 못 내게 했습니다. 이것이 백성들에게는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로서 백성들에게는 불가능한 명령을 지키라고 권면해 놓고서, 정작 자기들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위선적인 사람들이었던 것이죠.

5절에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와 같이 껍데기 신앙, 위선적인 신앙을 하게 된 이유는 그들의 종교생활의 목적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음을 밝히셨습니다. 남들에게 존경 받고, 인정 받고, 칭찬 받는 것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단지, 자신들이 백성들에게 높임 받는 것만 애지중지하며 신앙생활 했습니다. 5절에 “그 경문 띠를 넓게 했다”고 합니다. 본래 유대인들은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보면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으라”는 말씀을 따라, 율법 글귀를 기록한 경문을 이마와 왼팔에 가죽끈으로 고정하여 틈나는 대로 보면서 경건에 힘썼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기 위한 순수한 목적으로 시작 되었습니다. 그런데 과시욕이 지나치다 보니 이 경문을 기록하는 경첩을 더욱 크게 만들어서 타인에게 자신의 경건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의 경건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 내가 거룩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을까?’ 이것이 종교 지도자들의 고민이었던 것이죠. 5절에 ‘옷술을 길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옷술은 희색, 청색 실로 짠 부속물로 겉옷의 가장 자리에 달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케 하는 기능, 마음과 눈이 욕심을 따라 방종하게 살지 않도록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옷술을 길게 만들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들이 더 경건하고 거룩하게 보이려는 열망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강력하게 책망하셨습니다.

6-7절을 보니 그들은 언제나 상석에 앉기를 즐겨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잔칫상의 오른쪽 상단 끝이 가장 높은 자리입니다. 유대에서는 잔치가 벌어지면 가장 귀한 손님에게 이 자리를 내어 줍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서로 상석을 차지하기 위해서 아귀다툼을 하기도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바로 잔치의 상석 앉기를 좋아했습니다. 또한 회당에서 사람들의 눈에 가장 잘 띄는 높은 자리를 앉기를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려는 열망 때문에 회당의 상좌에 안기를 즐겨했습니다. 시장에서 지나갈 때는 사람들이 허리 숙여 그들에게 인사하고, 사람들이 “선생님! 랍비여!”하고 불러주며 존경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이것은 이런 호칭을 일절 사용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랍비로 대접받는 일을 거부하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참으로 ‘위대하신 분’, 참 ‘랍비’라고 부를 수 있는 한 분 하나님 아버지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랍비가 참 많았습니다. 각자 자신이 설립한 일종의 학파를 운영하며 제자들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 랍비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 한 분 뿐이시기에 오직 그 분만을 높이고, 그 분만을 존경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고 하지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육신의 아버지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잘못이 아닙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모시는 랍비를 ‘아버지’라고 부른 것을 의미합니다. 랍비를 존경하다 보니 그를 아버지처럼 모시는 것입니다.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같는 것이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받으셔야 하는 영광을 사람에게 돌리지 않도록 주의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잘못된 동기와 마음으로 종교생활 하는 자들에게 취하지 말고, 그들을 숭배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도의 핵심을 11-12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23:11-12] 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제자도의 핵심은 넓은 경문을 차거나, 긴 옷술을 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잔치상에 상석에 앉거나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애와 죽음을 통해서 보이셨던 것과 같이 낮아지고 또 낮아져서 사람들의 종이 되어 섬기며 나누며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타인의 필요를 민감하게 돌보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 천국에서는 높은 사람입니다. 바로 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예수님께서 보실 때 가장 보람 되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는 복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