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3.21. 계명 논쟁 (마태복음 22:34 – 22:46)

오늘도 참으로 좋은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더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가지고 “아는 것을 실천하는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TV 뉴스를 보면 청문회 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청문회에 불려간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하나 같이 긴장한 표정들이 역력합니다. 시퍼렇게 선 칼날처럼 날카로운 질문공세 앞에 어떤 사람들은 연신 땀을 닦으며 대답을 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상황이 마치 청문회에 불려간 사람과 유사합니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의 잘못을 책잡기 위하여 그에게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을 계속해서 물어보고 있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다윗시대의 대세장으로 섬기던 ‘사독’으로부터 그 이름이 유래되었습니다. 사두개인들 상당수가 당대의 지식인이며, 대제사장도 포함 되었으며, 부유한 귀족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정통한 자들로서 오늘날로 말하면 신학교 교수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당대 가장 정통한 사람들이 다 한자리에 모여 예수님 한 사람을 놓고 질문 공세를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에는 이들이 예수님께 물어 본 대답하기 참 곤란한 질문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 그대는 로마 정부에 세금을 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까?” “예수, 정말 사람이 죽은 다음에 부활이 있소? 당신은 어찌 그리 호언장담 할 수 있소?” “미스터 예수, 당신 말대로 부활이 있다고 칩시다. 우리 율법은 형이 죽으면 동생이 그 형수와 결혼하여 대를 이으라 명하고 있소. 만약 일곱 형제가 있어 차례대로 형수와 결혼하였소. 그렇다면 형제들이 부활하면 그 아내는 누구의 부인이 되겠소?”

사람들이 하도 예수님을 좋아하고 그를 따르자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기하여 그를 흠잡기 위하여 이토록 곤란한 질문들을 물어본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궁지로 몰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질문에 하나도 막힘 없이 지혜롭게 모두 답하셨습니다. 이에 사두개인들도 바리새인들도 백성들도 예수님의 지혜와 권세 있는 대답에 모두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 때 한 율법사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이 율법사는 오늘날로 말하면 ‘변호사’에 해당하는 사람입니다. 율법사들은 율법의 두 계명이 상충되는 경우에 어느 계명이 더 큰지를 판단해 주던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부모를 섬기는 것보다 큰 계명이므로 하나님께 재산을 바친다고 선언하면 부모를 부양할 의무가 없어진다 가르쳤습니다. 이 율법사는 가장 자신 있는 분야에서 예수님과 논쟁을 벌여 그 중 오류를 발견하면 즉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릴 심산이었습니다.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입니까?” 오늘날이야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다 가지고 있어서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성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제지술이 발달하지 않아 종이가 귀한 시대였으며, 인쇄술도 발달하지 않아 율법 말씀 전체를 보는 기회가 흔치 않았습니다. 이 율법사는 나사렛 시골 출신이며, 가난한 목수의 아들인 예수님을 무시하며 ‘정규 신학교도 나오지 않은 이 사람이 어찌 율법의 핵심을 알겠는가?’하고 예수님께 어려운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도 막힘 없이 이 질문에 대하여 답하셨습니다. 우리 본문 37-40절 말씀을 함께 다시 읽겠습니다.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40절에 나오는 율법은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모세오경을 의미합니다. 선지자는 이사야로부터 말라기까지 이르는 선지자들의 글입니다. 즉 율법과 선지라라는 말은 구약성경을 의미합니다. 강령이란 말은 “일의 근본이 되는 큰 줄거리” 뜻합니다. 즉 하나님의 율법을 압축하고 또 압축하여 가장 중요한 엑기스를 짜내면 남는 두 가지가 바로 첫째로 ‘하나님 사랑’ 이고 둘째가 이웃 사랑입니다. 이로서 예수님은 마지막 시험까지 통과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곤란에 빠뜨리려 했던 이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대하여 정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이 그토록 수도 없이 반복하여 예언한 메시아가 그들 눈 앞에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이들이 물어본 질문들은 몰라서 물어본 것이 아닙니다.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을 넘어트리기 위하여 물어본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핵심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 율법을 가지고 이웃을 정죄하고 넘어뜨리는데 사용하고 있던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율법을 지키는 데는 미숙한 신앙을 가리켜 ‘가분수 신앙’이라 합니다. 말씀을 아는 머리는 큰데 말씀대로 살아가는 몸은 작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물론 반대로 섬기는 데는 누구보다 앞장 서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잘 모르는 ‘진분수 신앙’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평생 말씀을 연구하며, 말씀을 배우고 가르쳐 온 사람들이라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머리로 채우는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얼마 전 타개한 기독교 작가 중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셨던 신용복 교수의 글을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일생 동안의 여행 중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머리 좋은 사람과 마음 좋은 사람의 차이, 머리 아픈 사람과 마음 아픈 사람의 거리가 그만큼 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가장 먼 여행이 남아 있습니다.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 그것입니다.” 신용복 교수가 강조하고자 했던 삶은 아는 데서 그치는 삶이 아니라, 느끼는 데서 그치는 삶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행함으로 옮기는 삶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은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말씀은 삶으로 살아가는데 그 진짜 목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처럼 많은 시간 율법을 연구하고 배웠다해도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교회 예배 가운데 말씀을 들으며 깨닫기도 하고, 홀로 성경을 읽는 그 자리에서 깨달음이 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은 깨달음에서 행함으로 옮겨가야 진짜 신앙이 됩니다. 오늘 이 하루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손과 발로 우리의 온 몸과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의 열매 맺는 하루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