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2.18. 치유와 경계 (마태복음 12장 9-21절)

(오늘 새벽예배는 녹음 파일이 없습니다. 성도님들의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회당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곤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안식일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회당을 찾아왔겠습니까? 바로 그 회당에는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일하는 것은 죄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지금 당장 죽을 것 같은 사람이 아닌 한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하는 것도 죄로 보았습니다. 이들이 어찌나 극단적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사람이 죽어가지 않는 한 안식일에 치료하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이기 때문에 아픈 사람을 치료하지 않는 것은 우스꽝스러울 뿐만 아니라 잔인하기까지 합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율법을 주신 목적과 의도는 선하지만, 그 좋은 율법의 정신은 잊어버리고, 종교 행위와 의식에만 얽매이면 결국 위험한 길로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볼 때 손 마른 사람 역시 사실 죽을 위험에 있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예수님께서 과연 안식일에 이 손 마른 사람을 고치나 고치지 않나 보고자 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시면 그들은 율법을 어긴 죄로 예수님을 고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런 간교하고 교활한 의도를 가지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1-12절 말씀을 한 번 눈으로 보시겠습니까?  “만일 너희 중 누군가 양 한 마리가 있는데 안식일에 그 양이 구덩이에 빠진다면 붙잡아 꺼내 주지 않겠느냐? 하물며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니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다.” 주님께서는 금전적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 한 마리를 살리는 일에는 아무렇지 않아 하면서도, 안식일에 아픈 자를 고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정죄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목적은 쉼과 안식 속에서 노동하지 않아도 먹여 주시고 살게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의 이러한 기본 정신은 빼 버리고 오히려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습니다. 그들에게는 분명 종교적 열정은 있었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품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가진 종교적 열심의 최종 목표는 무엇입니까?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을 구하고, 사람을 살리는 일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참된 정신은 선을 행하는 것, 즉 사람을 살리는 일임을 언급하시며 손이 마른 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을 펴 보아라!” 그러자 놀랍게도 손이 말랐던 그 사람이 손을 쭉 폈고 다른 손처럼 회복됐습니다. 몸이 불편하여 쉼을 누리지 못하던 이 사람의 병을 고침으로서 예수님은 그에게 참된 쉼을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시고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화가 머리 끝까지 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이적을 행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하나님을 모욕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열심은 있었으나, 그들의 삶이 만들어 내는 것은 분노, 질투, 미움, 다툼 뿐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신앙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에도 바리새인과 같은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종교적 열심은 있으나, 그들의 삶이 만들어 내는 것은 분열과 다툼입니다. 미움과 상처 뿐입니다. 교회에 온 영혼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고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다치게 하고 멍들게 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을 아프게 하면서도 여전히 속으로는 자신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상황입니까?

우리는 우리가 가진 종교적 열심이 어떤 열매들을 맺고 있는지 진중하게 점검해 봐야 합니다. 이웃을 미워하고 사람들을 정죄하고, 가슴 아프게 하고, 상처 주는 열매들이 맺어지고 있다면 바리새인들처럼 잘못된 동기로 신앙생활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직하게 스스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다르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열정은 사람들을 살렸습니다. 상처 입은 자들을 치유하고 그들의 영혼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머문 자리는 용서와 회복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의 삶은 변화하였고, 그들은 더욱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열매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이와 같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사람들을 살리고, 그들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고, 하나님께로 영혼들을 더욱 가까이 나아오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마음에 분노와 미움이 가득합니다. 14절에 보면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죽일 수 있을지 의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예수님께서 무슨 미움 받을 나쁜 을 하셨단 말입니까? 예수님이 하신 일은 사람을 살리고 고치신 일 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오늘도 우리가 선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선한 길을 걸어가려고 할 때 바리새인들처럼 우리들을 정죄하고 미워하고 분노를 일으키는 방해자들이 항상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염두 해 둡시다. 그러나 그들 때문에 우리이 사역이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사명의 자리에서 떠나서도 안 됩니다. 또한 그들과 맞서 싸우려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끝까지 사랑하면 됩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 하고 싸우면 누가 이깁니까? 예수님이 이깁니다. 바리새인이 두려워서 자리를 두려워서 떠난 것이 아닙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두려워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들은 논리적으로도 말로도 힘으로도 예수님을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밭을 가는 소를 보십시오. 귀에 파리 떼가 날려도 밭에 있는 황소는 묵묵히 밭을 갑니다. 마찬가지로 바리새인들의 비난과 공격에도 예수님은 성내지 않으시고 묵묵하게 자신이 맡은 사명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그들을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구원하여 안식을 누리는 일에 힘 쓰셨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이사야 선지자가 메시아에 대해서 예언한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분은 다투지 않으셨습니다. 들레지 아니하였다는 말은 ‘성내지 아니하였다’, ‘화내지 아니하였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길에서 그 분이 바리새인들과 싸우기 위해 고래고래 소리지르거나 고함 치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다만 주님은 상한 갈대처럼 상처 입은 인생들을 고치셨고, 꺼져 가는 촛불 심지처럼 연약한 인생들을 치료하시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억울한 마음에 바리새인들하고 다투시고 싸웠다면 시간만 낭비했을 겁니다. 더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대적하기 위해 모여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주장을 관찰하기 위해 그들과 말다툼하지 않으셨습니다. 묵묵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길, 사람을 살리고 영혼을 구원하는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전히 이 세상에는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자들을 바리새인과도 같은 핍박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예수를 죽이려 했던 것처럼, 지금도 세상과 악인들은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자들을 죽이려 안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과 맞서 똑같은 방법으로 분노와 미움과 다툼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택해야 할 길은 사랑이고, 용서입니다. 우리는 갈대처럼 연약한 자들, 꺼져가는 심지처럼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유하고, 다시 세워 일어날 수 있도록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어떠한 어려움에도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묵묵히 그의 사명의 길을 걸어가셨듯이, 다투거나 성내지 아니하고, 상한 갈대와 같은 상처 입은 사람들,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연약한 영혼들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