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9. 하나님의 변호인을 자처하는 엘리후 (욥기 33장 1-17절)

총 42장까지 구성된 욥기의 대부분 내용은 욥과 세 친구들의 계속되는 난타전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이 당한 큰 재앙과 극심한 재앙은 모두 그가 지은 죄악의 결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욥이 죄를 회개를 해야 하고, 그렇게 할 때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욥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욥은 전적으로 반박합니다. 자신은 하나님께 숨겨 온 죄가 없으며,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께 회개하였고, 또한 이렇게 엄청난 재앙을 당할 만큼 악한 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욥과 세 친구, 이 두 진영의 말다툼이 욥기 31장까지 이어집니다. 결국 세 친구들은 욥이 자신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을 의인이라고 주장하자 그를 설득하기를 포기합니다. 욥도 속사포처럼 쉬지 않고 여태까지 자신의 의로움과 억울함을 주장했던 자세에서 잠쉬 입을 닫고 숨을 돌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때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엘리후]라는 인물입니다. 그는 욥과 세 친구들 보다 어린 세대의 젊은이로써 지금까지 주고 받은 이야기를 곁에서 다 듣고 있었습니다. 우리 한국도 어른들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어린이가 대화에 껴드는 것을 예의가 아닌 것으로 여기죠? 욥기의 배경 때도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엘리후는 욥과 세 친구들 사이에 오고 가는 말을 들으며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어려서 잠자코 듣고 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욥의 세 친구들이 욥의 질문 “왜 하나님께서 의로운 자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가?”에 대해서 아무런 답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매우 답답해 했습니다. 또한 엘리후는 욥이 자신은 의롭다 주장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나타나 이 모든 고통의 목적과 이유가 무엇인지 대답하지 않으신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 것에 대해서도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욥과 세 친구 사이에 오고 가는 긴 대화를 곁에서 오랫동안 듣고 말을 참아온 젊은이 엘리후가 드디어 입을 열게 됩니다. 그리고 엘리후가 한 번의 긴 호흡으로 욥에게 이야기를 하는데 그 분량이 욥기 32장부터 37장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후 욥기 38장부터 그토록 욥이 기다리던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에게 직접적으로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욥의 회복과 추복으로 욥기가 마무리 됩니다. 엘리후는 먼저 욥이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렇게 아무 이유 없이 고통 가운데 두시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그것은 욥이 하나님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책망합니다. “[33:8-13] 8 그대는 실로 내가 듣는 데서 말하였고 나는 그대의 말소리를 들었느니라 9 이르기를 나는 깨끗하여 악인이 아니며 순전하고 불의도 없거늘 10 참으로 하나님이 나에게서 잘못을 찾으시며 나를 자기의 원수로 여기사 11 발을 차꼬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하였느니라 12 내가 그대에게 대답하리라 말에 그대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13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하여 어찌 하나님과 논쟁하겠느냐

엘리후가 욥에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욥 어르신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게는 잘못이 없다. 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나는 결백하다. 내게는 허물이 없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내게서 흠 잡을 것을 찾으시며, 나를 원수로 여기신다. 하나님이 내 발에 차꼬를 채우시고, 내 일거수 일투족을 다 감시하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욥 어른께 감히 말합니다. 어른은 잘못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보다도 크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어른께서는, 하나님께 불평을 하면서 대드시는 겁니까? 어른께서 하시는 모든 불평에 일일이 대답을 하지 않으신다고 해서, 하나님께 원망을 할 수 있습니까?”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욥이 당하는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 침묵하신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잘못은 아니라고 변론합니다. 14절을 보면 엘리후는 오히려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신데, 사람이 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해서 듣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을까요? 15절을 보니, 꿈을 꿀 때에, 밤의 환상을 볼 때에, 깊은 잠에 빠질 때에, 침실에서 잠을 잘 때에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엘리후는 욥의 주장처럼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시지만 욥이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내심 그를 책망하고 있는 것이죠.

욥의 세 친구들이 가지고 있었던 시각은 인과응보의 세상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고통과 재앙이 일어난다? 그것은 그가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벌입니다. 따라서 욥에게 일어난 고통과 재앙은 그가 지은 죄 때문이다! 이것이 욥의 세 친구들이 가진 견해였습니다. 엘리후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고난을 사용하실 때도 있습니다. 어떤 목적입니까? 사람을 겸손하게 하시려고, 악한 행실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그러한 행실을 버리도록 일종의 예방주사 차원으로 고난을 주신다는 겁니다. “[33:16-17] 16 그가 사람의 귀를 여시고 경고로써 두렵게 하시니 17 이는 사람에게 그의 행실을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의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오늘 본문에 나오는 엘리후가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 중에 틀린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엘리후도 결국에는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두 가지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첫 번째는 엘리후는 자신이 욥이나 세 친구들 보다 하나님을 더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가 깨달은 하나님의 모습이 전부라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둘째는, 그리하여 엘리후는 자신이 가진 시각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전부 이해한냥 교만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엘리후 자신이 비난하고 있던 욥의 세 친구들과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고통을 당하고 큰 슬픔을 당한 욥을 위로하기는 커녕 오히려 욥을 책망하고 비난하는 데 이르게 됩니다. 욥기 32-37장을 보실 때는 이런 관점으로 보셔야 합니다. 지금 이 사람이 하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그가 말하고 있는 목적과 의도가 정말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얼마나 잘났는지, 자기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 나타내기 위한 자기자랑의 냄새가 가득 납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신앙생활의 연수가 길어지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얼마든지 엘리후가 빠진 교만이란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다 알지! 하나님 이런 분이시지?!” 마치 하나님을 자기 주머니 속에 넣었다 뺐다 하는 물건 대하듯이, 그 분에 대해서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대하는 것은 크다 큰 교만입니다. 물론 우리가 성경을 배우고, 말씀을 연구함으로써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고 계신 지를 더욱 배워가는 것은 필요하고 거기서 오는 기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우리 평생토록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마치 하나님을 내가 가진 박스 안에 집어 넣어 이해하려고 하고,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전부인 냥 으스대는 것은 교만 중의 교만입니다. 엘리후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그는 분명 하나님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욥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무익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안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교회는 이런 곳이야! 신앙생활은 이렇게 하는 거야!” 하는 식의 정형화 된 지식들과 절대적이라고 생각해온 우리들의 신앙습관들이 오히려 함께 신앙 생활하는 이들에게 고통을 가증시키고 잘못된 길로 이끌어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영적 지식들과 경험들은 영혼을 살리는데 유익합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엘리후처럼 다 아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자기 자신과 타인의 영혼을 죽이는 가장 치명적인 교만의 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분을 더 새롭게 아는 지식을 구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사용할 수 있도록 늘 힘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