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18. 하나님께 원통함을 호소하다 (욥기 13장 1-19절)

지난 2013년도에 개봉한 한국 영화 중에 [7번방의 선물]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가 지금도 유명한 이유는 할리우드의 화려한 액션신이나 컴퓨터 그래픽도 없이 단지 스토리 하나만으로 관객 천만 명을 넘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억울한 누명을 쓴 한 죄수의 이야기 입니다만, 훗날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실제 주인공 정원섭 씨의 이야기가 세간에 밝혀져 더 화제가 되었습니다. 1972년도 강원도 춘천에서 만화방을 운영하던 정씨는 난데없이 역전파출소장의 딸을 성폭행한 후 살인한 혐의를 뒤집어 쓰게 됩니다. 정씨는 당시 경찰관들이 갖은 고문을 하며 자백을 강요하자, 결국 거짓 자백을 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15년이란 긴 세월을 철장 안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자기가 저지른 범죄도 아닌데, 고문 관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짓 자백을 그 긴 세월 동안 옥살이를 했으니 얼마나 억울 했을까요?

욥의 심정이 지금 정씨의 마음과 유사 합니다. 욥기에 등장하는 세 명의 친구들은 고문관이 되어 욥에게 거짓 자백을 요구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들은 욥이 큰 재앙을 당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분명 그 동안 죄를 짓고 살아온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세상을 인과응보라는 단순한 논리로 해석하며 하나님은 선인에게는 복을 주시고 악인에게는 벌을 주시는 분이시기에 욥이 벌을 받는 것으로 보니까 엄청난 죄인임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세 친구는 ‘누가 더 열심이다’라고 비교할 것도 없이 모두가 다 욥을 정죄하고 비난 했습니다. 욥은 얼마나 억울했을까요? 차라리 친구들의 질책대로 차라리 이런 엄청난 재앙을 벌로 받을 만큼 지은 죄가 있으면 회개라도 하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기의 삶을 돌아봐도 욥은 경건하게 살려고 평생 최선을 다해 온 것 밖에는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친구들은 계속해서 욥을 공격합니다. “욥, 너가 하나님을 몰라서 그러는데 하나님은 선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복을 주셔. 악인에게는 반드시 벌을 주시고. 그러니까 넌 분명 죄인이야! 어서 너의 죄를 우리들 앞에 실토해 보거라!” 듣다 보니 욥도 화가 났습니다. 친구들보다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서 더 잘 아는 것 같은데, 저 친구라는 사람들이 자신의 아픔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친구의 처지를 전혀 헤아려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비록 저 세 사람은 지혜자인 척하고 말하고 있으나 욥이 볼 때는 세명 다 미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욥기 12장에 욥은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지식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절대적인 지혜와 권능을 가지고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진리였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이 세상 가운데 악인이지만 형통하는 자가 존재하고 부도덕하고 부정직하게 살지만 여전히 세상을 평안하게 지내는 악인이 존재함을 필력했습니다. 이를 통해 자신처럼 의인이지만 고통을 당하는 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설명한 것이죠. 그리고 오늘 13장에 욥은 이이서 친구들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변론합니다.

2절 입니다. “(욥 13:2)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한 내가 아니니라” 욥이 지금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거죠. “자네들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닐세. 나도 자네들 못지 않게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어!” 친구들이 얼마나 욥에게 하나님을 모른다고 몰아붙였으면, 지금 욥이 이렇게까지 말했을까요? 4-5절 말씀, “(욥 13:4)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데 없는 의원이니라 (욥 13:5) 너희가 잠잠하고 잠잠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 4절은 한 번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욥이 자기를 위로하러 온 친구들을 향한 평가 입니다. 다 자기는 의인인 척하고 욥만 죄인으로 만드는 거짓말쟁이들, 친구의 재앙을 보고도 위로 한 마디 해주지 않고 격려나 용기를 주기는커녕 아프게 더 아프게 만드는 쓸데 없는 의원 입니다.

8-9절, “(욥 13:8) 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좇으려느냐 그를 위하여 쟁론하려느냐 (욥 13:9)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너희가 사람을 속임 같이 그를 속이려느냐” 욥은 친구들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욥에게 권면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들이 욥의 고통을 정죄함으로 인해 하나님께 책망 받을 죄를 짓고 있다고 말하며 강하게 친구들은 질책했습니다. 실제로 욥기 후반부에 가면 하나님은 친구 욥의 세 친구들을 강하게 책망 하십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여기서 욥이 친구들에게 내린 판단은 정확했던 것이죠. 그들은 지혜 있는 척하고 욥을 정죄하고 비난했지만, 실제로 하나님이 보실 때는 이 세 친구들이야말로 미련한 죄인들이었습니다.

욥기가 읽기 어려운 책인 이유가 욥의 친구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다 옳은 말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선인은 복 주시고 악인은 심판하신다. 그러너 지금이라도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실 것이고, 지금이라도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너희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언뜻 들으면 다 맞는 말이 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그들은 너무 신앙을 도식화 해버렸어요. ‘인과응보’라는 하나의 렌즈를 가지고 세상을 다 해석하려다 보니 문제가 발생해버린 거죠. 욥의 말대로 비록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이지만, 이 세상에는 여전히 부조리가 존재하여 형통한 악인이 존재하고, 고통받고 있는 의인이 있음을 이들은 인정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시선에서 볼 때는 의롭게 살아간 욥에게 찾아온 고통과 재난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욥은 12절에 이렇게 친구들에게 말했습니다. 12절 “(욥 13:12) 너희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요 너희의 방어하는 것은 토성이니라” 여기서 ‘재’는 가치 없는 것입니다. 친구들의 조언은 욥이 볼 때 무가치하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 입니다. 토성은 쉽게 무너지는 성입니다. 즉 세 친구들이 주장하는 논리는 빈약하고 허술해서 쉽게 공략할  수 있는 토성과 같다는 것이죠. 13절에 욥은 강한 어조로 친구들에게 말합니다. “(욥 13:13) 너희는 잠잠하고 나를 버려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일이 임하든지 내가 당하리라” 저는 한글 성경이 너무 부드럽게 번역한 것처럼 보입니다. 쉬운 성경은 이렇게 번역 했어요. “(욥 13:13) 제발 입 다물고 내 말 좀 들어 보게나.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내가 당할 것 아닌가?” 세 친구들을 향한 욥의 분노가 느껴 지십니까? 하루 아침에 전재산을 잃어버리고 열 자녀를 잃은 친구를 찾아와서 위로는 못해줄 망정 정죄하고 비난한 욥의 세 친구들… 우리가 욥이라도 이렇게 화가 나지 않았을까요?

15에 욥이 말합니다. “(욥 13:15)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리라” 15절은 한글 성경만 보면 무슨 말씀인지 사실 오해하기 쉽습니다. 영어로 보면 “Even if he killed me.”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다시 번역해보면 “비록 하나님께서 나를 죽이신다고 할지라도 나는 주님을 믿고 끝까지 내 주장을 굽히지 않을 것이야.”라는 해석이 나옵니다. 즉 욥이 친구들에게 끝까지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죠.

욥, 참 억울했던 것 같아요. “(욥 13:16) 사곡한 자는 그의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 (욥 13:17) 너희는 들으라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설명을 너희 귀에 담을지니라” 욥이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거에요. “여보게 친구들 내가 하나님 앞에 내 억울한 사연을 토로하는 것만이… 오직 그것만이 내가 사는 길이라 믿네. 악인은 그분 앞에 감히 나아갈 수도 없기 때문이지. 내 말 좀 들어 주게나. 제발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게나.” 욥기 13장에는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며 친구들이 자신을 죄인이라 정죄하고 비난한 것에 대하여 억울함이 극치에 달한 욥의 심정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이 억울함을 풀어준 분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더 절실하게 깨닫고 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정리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끝까지 가서 자신은 이런 재앙을 당할만한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다고 결백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중에 욥기 후편에 가면 하나님께서 나타나시자 욥은 그의 입을 다뭅니다. 스스로 의롭게 생각했던 욥이지만, 정작 완전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는 한 마디도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가운데 우리는 억울함을 가지고 끝까지 하나님을 붙들었던 한 사람의 신앙의 흔적을 보게 됩니다. 물론 때론 욥도 하나님께 그만 놓아달라고, 이대로 날 죽여달라고 원망하고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이 처한 원통함과 억울한 상황을 해결해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욥과 같이 인생의 고통과 위기가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오늘 이 새벽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올려 드리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라도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우리의 원통한 마음, 억울한 사연들, 우리의 고통과 문제들 하나님은 다 들어주십니다. 어쩌면 우리들도 이 힘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불평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새벽 이제라도 다시 한 번 하나님께 나아 가십시다.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실 분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실타래처럼 꼬이고 엉켜버린 인생을 풀어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얍복강의 야곱처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욥처럼 끝까지 기도로 하나님과 씨름하십시오. 때가 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