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31. 하늘의 보물 (마태복음 6장 19-34절)

 

한 남성이 티셔츠를 구매하려고 합니다. 그의 눈 앞에는 두 가지 티셔츠가 놓여 있습니다. 직접 손으로 만져보니 하나는 옷이 조잡합니다. 바느질도 제대로 잘 되어 있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빨래 몇 번 하면 옷이 쉽게 헤어질만한 재질입니다. 나머지 다른 티셔츠를 만져보니 원단이 고급입니다. 바느질도 잘 되어 있고 튼실합니다. 과연 여러분이라면 어떠한 티셔츠를 구입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옷이나 신발 혹은 가방을 살 때 웃돈을 조금 주고라도 튼실한 것을 사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값비싼 돈을 주고 산 명품 옷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닳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최고급 승용차라 해도 시간이 지나면 녹이 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하시는 말씀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왕이면 오래도록 변함없는 걸 위해 살아가렴.” 19-2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6: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눈에 보이는 이 세상 것들이 전부인 냥 살아가는 자들은 그것들이 헤어지고 닳고 녹이 쓰는 것을 보고 살아갈 것입니다. 살다 보면 때로는 속기도 하고 빼앗기기도 하고 사기도 당합니다. 열심히 살았는데도 손에 쥐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듯 사라져 버릴 것들, 자나가 버릴 것들을 위하여 살아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루는 예수님에게 한 청년이 나와서 자신의 선행을 자랑합니다. “주님 제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율법에 기록한 것을 다 지켰어요! 저 참 잘 했죠?” 이 사람은 칭찬을 받고 싶어서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애야, 네가 정말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가서 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그러나 청년은 재산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 버렸다고 합니다. 이처럼 세상에 미련을 둔 사람은 하나님을 따르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무거운 돌을 들고 태평양을 건너가려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결코 부자 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것을 하나의 큰 축복으로 봅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가진 물질을 하나님 보다 더 소중히 여길 때 발생합니다.

세상 것이 좋아 보이는 눈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투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이 좋아 보이는 사람은 영적인 것을 위해 살아갈 것입니다. 2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6: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눈이 어둡다는 것은 말 그대로 시력이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1.0 2.0 이런 수치적인 시력이 좋고 나쁨이 아닙니다. 똑 같은 산길을 걸어도 등산객은 평범한 풀과 나무만 보지만, 심마니는 귀한 약초와 값비싼 식물들을 발견합니다. 바로 이러한 눈의 차이를 의미합니다. 즉 이 세상을 살아가며 어떤 사람들은 천국은행의 가치를 알고 그곳에 보물을 쌓아갑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집과 가산을 팔아서 그 밭을 삽니다. 극상품의 귀한 진주를 발견한 장사꾼은 자신이 가진 소유를 다 팔아서 진주를 삽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의 가치를 발견한 ‘눈’을 가진 사람들의 공통점 입니다. 우리가 이런 하늘의 가치를 발견하는 눈을 가지면 우리 인생이 밝아질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참 미련합니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 중 십분의 일을 헌금합니다. 감사헌금도 내고 주정헌금도 냅니다. 그리고 교회 가서 돈도 안받고 일하고 또 시간도 에너지도 모든 것을 바칩니다. 그러나 진짜 하늘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은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천국은행이 주는 행복과 즐거움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보실 때 모든 것을 바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이런 삶이야말로 가장 복되고 지혜로운 삶입니다.

2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경제학에는 ‘기회비용’이란 용어가 있습니다. 내가 가진 자원은 정해져 있습니다. A를 사면 B는 포기해야 합니다. 반대로 B를 갖기 위해서는 A를 포기 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선택에서 내가 갖지 못하는 것을 기회비용이라 합니다. 영적인 생활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은 바로 이 영적 기회비용으로 선택되어 집니다. 재물을 선택하는 자는 하나님을 함께 선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재물 이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으면 모든 것을 찾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33절을 봅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기독교인들 중에도요 밖으로 말은 안 하지만 마음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은 현실과 너무 달라. 예수님은 신이니까 쉽게 그렇게 이야기 하시지. 예수님이 차가운 세상의 현실을 잘 모르시네.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은 현실도피적인 발상일 뿐이야!”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세상이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근심하게 하고 또 염려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입에 풀칠하고 사나? 자녀들 대학 등록금은 어떻게 내나? 모기지는 언제 갚나? 노후자금은 어떡하나?” 이런 끊임없는 질문들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빼앗아 갑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 모든 상황을 뛰어넘어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애들아, 그런 거에 마음 빼앗기지 마. 우선순위를 확실하게 정하고 살아가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렴. 그러면 나머지는 다 알아서 정리 될 꺼야. 첫 단추가 중요해. 첫 단추만 잘 끼면 나머지는 그대로 다 알아서 될 꺼야.” 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실 수 있기 때문일까요? 예수님께서 정말 이 세상의 차가운 현실을 잘 몰라서 그러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 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부분까지 보고 계셨기에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쉽게 예를 들면, 어린 아이는 사탕만 보지만, 부모는 사탕을 먹으면 썩게 되는 이까지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혜의 차이입니다. 아이와 어른의 지혜 차이가 이렇다면 하나님과 우리의 지혜의 차이는 얼마나 클까요? 우리는 현재와 상황만 보지만, 주님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과거, 현재, 미래, 인간적 차원과 우주적 차원, 그리고 하나님의 차원에서 우리의 삶을 관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나보다 더 지혜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오늘 말씀대로 하나님 나라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혜의 눈을 뜨게 해주시기 위해, 주님은 이 세상에서 자기 힘으로 살아가지 아니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두 가지 자연의 주인공들을 소개합니다. 바로 공중의 새들과 들에 핀 백합화입니다. 새들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새들은 그리 머리가 좋지 않습니다. 힘도 약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시사철 새는 굶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가 새들을 먹이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들에 피어난 백합화는 일하지 않습니다. 백합화는 옷감을 짜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 꽃이 가진 영광은 인류 역사상 가장 부유한 시절을 살아간 솔로몬이 입은 모든 옷을 합해도 이 꽃의 영광을 비길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가 백합화를 입히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이라 이 말씀하십니다. 공중에 나는 새들을 먹이시고, 들에 피어나는 백합화를 영광으로 입히시는 분, 그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 이십니다.

“아무개야, 하나님 아버지가 너의 내일을 책임져 주실 거야 걱정하지 마. 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렴.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 채워 주실 거야!” 주부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오늘 저녁에는 무슨 메뉴를 해 먹을까 고민해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중국집에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짜장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고민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런 차원에서의 염려가 아닙니다. 성경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하여 계획하고 생각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미래를 생각하며 걱정하고 근심하며 불안해 하는 삶을 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속 주님은, 삶의 우선순위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이 질문은 답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을 다음과 같이 바꿔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걱정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내 삶의 가치를 보여줍니다. 우리 주님은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생각하며 그것을 위해 살아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로 이 영적 첫 단추를 잘 잠그는 사람만이 나머지 인생의 단추를 잘 잠그게 됩니다. 오늘 이 하루 먹을 것 입을 것을 염려하며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 분의 의를 내 삶에 이루기 위해 살아가시는 귀한 하루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