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8. 더 나은 의 (마태복음 5장 21-32절)

한 부부가 부부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더 이상 남편에게 함께 살 수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자 남편이 오히려 버럭 화를 냅니다. “아니, 무엇 때문에 이렇게 울고불고 그러나? 나 같이 대기업 다니고, 높은 연봉 받고 잘 나가는 남편 만나면 행복해야 하는 거 아니야? ” 그러자 아내가 대답합니다. “맞아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당신은 세상에 많은 여자들이 꿈꾸는 그런 남편이지요. 그러나 나에게는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요. 당신이 나에게 이것 하나만 준다면 다른 건 다 필요 없어요. 그러나 다른 것들을 다 줘도 이것 하나를 나에게 주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과 함께 살 수 없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남편이 묻습니다. “그게 뭔데?” 아내가 말하기를 “나를 사랑해주세요.” 그러자 남편이 대답합니다. “안돼. 다른 건 다 줘도 내 마음은 줄 수 없어. 다른 건 다 줄 수 있지만 그것만은 안 되.” 이야기 속 남편은 돈만 벌어다 주면 다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부 사이에서 사랑이 빠지면 나머지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지요.

예수님 당시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던 바리새인들이 이 남편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들어나는 행위만 만족되면 속은 아무래도 상관 없다고 생각 했습니다. 겉으로 간음하지 않지만 그들의 속에는 음란함이 가득했습니다. 겉으로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지만, 그들의 속은 살기와 미움 그리고 증오가 넘쳐났습니다. 그러나 결혼 생활에서 사랑이 빠지면 나머지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처럼, ‘마음과 중심’ 빠져버리면, 바리새인 같이 모든 법을 지킨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율법의 근본적인 목적과 정신은 사람의 겉모습만이 아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십계명에 기록된 살인과 간음이 두 가지를 행하지 않았기에 속은 썩어가고 있음에도 여전히 자신을 의롭게 여기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들을 향하여 더 높은 차원의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21-2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5: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누군가를 직접적으로 칼로 찔러 죽이지 않았어도, 그에게 화를 내는 사람, 다른 이에게 욕하는 사람도 벌을 받을 것이며 지옥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들으면 가의 충격적인 설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를 의인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여기며 영적 우월주의에 빠져 살아가고 있었는데, 오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 너희가 아무리 살인 하지 않았어도 형제에게 화내고 욕한 사람도 지옥에 간다.”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기준은 사람이 지키기 어려운 수준까지 요구하십니다. 27-2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5: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이 말을 쉽게 풀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몸으로 죄를 짓지 않아도 마음으로 죄를 지으면 이미 몸으로 죄를 지은 것이나 다름 없다.” 도둑질 하지 않았어도 도둑질 하려는 마음만 품어도 이미 도둑질 한 것입니다. 아무리 행위로 죄를 범하지 않았어도 마음이 죄를 짓는 순간 이미 죄인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습관화 되어버린 율법준수로 인한 행위만 남고, 마음은 온데간데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가리켜 “껍데기 신앙”이라 합니다. 그들은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바리새인과도 같은 모습들이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 교회 성수하고, 십일조도 꼬박꼬박하고, 담배도 안 피고 술도 안마십니다. 그러나 정작 마음은 하나님과 멀리 살아갑니다. 행위는 있는데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습니다. 몸은 교회에 있는데 정신은 세상에 있습니다. 신분은 그리스도인인데, 삶은 세상사람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신앙생활을 비판하십니다. “이렇게 사는 자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과 그 심판이 동일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가히 충격적인 발언입니다. 구약 말씀을 짜고 짜면 나오는 말씀이 무엇일까요? 율법을 지켜라 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라’,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라’가 아니라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이 사랑에서 우러나온 행위여야 합니다. From inside out 이 되어야 합니다. 바리새인이 놓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라, 자기 의로움을 이루기 위해 율법을 지키려 발버둥 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호세아서 6장 6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은 제사나 번제보다 마음을 더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구약에서도 이미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미가서 6장 7-8절에는 다음과 같이 또 기록 되어 있습니다. (6:7) “내가 수천 마리의 수양이나 강물처럼 많은 감람기름을 가지고 간다면 여호와께서 기뻐하실까? 내 허물과 영혼의 죄를 위해 내 몸의 열매인 맏아들을 바칠까? (6:8) 사람들아, 여호와께서 선한 것이 무엇인지 너희에게 보이셨다. 그가 너희에게 요구하는 것은 옳은 일을 행하며 한결같은 사랑을 보이고 겸손한 마음으로 너희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천마리의 양이나 소 만마리의 기름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없는 신앙생활은 하나님 보실 때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가끔 어린 아이들이 집에서 엄마가 설거지 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다가, 자기가 설거지 하겠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럼 엄마가 하다못해 해보라고 하지요. 그럼 그게 설거지가 아니고 물장난에 가깝습니다. 즉 설거지는 설거지인데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 설거지 입니다. 결국에는 엄마가 처음부터 다시 설거지 해야 합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거룩하게 산다고 해도 어린아이 설거지하기처럼 하나님께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다 큰 아들이 서툰 솜씨여도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설거지를 한다면 비롯 어딘가 어설플지 몰라도 그의 모습은 어머니를 흐뭇하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마음은 행위를 온전케 하는 힘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의 약점은 어느 새 그것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습관화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사라지고 행위만 남는 신앙을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이 새벽예배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기 위하여 나온 이 새벽, 이왕 힘들게 나온 시간이라면, 몸만 가지고 나오지 마시고 마음도 가지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하나님 나라 백성은 마음부터 새로워지는 법입니다. 오늘 이 하루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마음으로 살아가시는 귀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