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라 함은 우리의 정결함, 불순물이 없는 순도 높은 소금을 의미합니다. 세상은 여러 가지 불순물들이 섞여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소금은 정결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소금이 짠맛을 잃는다는 것은 그 안에 불순물이 섞여 있다는 말입니다. 만약 이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린다면 어디에 쓸 수 있을까요?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무용지물이 되어 버려질 것입니다. 짠 맛을 내는 정결한 소금 같은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죄로 인하여 무미건조한 세상을 맛 갈 나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소금은 죽은 요리를 살릴 수 있습니다. 세상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죽어가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즉 우리가 본연의 짠맛을 내면 세상은 생명이 넘치는 공간이 될 것 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향하여 세상의 소금이라 말씀하십니다. 음식에 들어간 소금이 맛을 내듯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내야 하는 맛이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그 짠맛을 낼 수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착한 행실을 통해 그 맛을 낼 수 있습니다. 그냥 세상 사람들이 하는 대로 똑같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보며, “저 사람은 정말 다르구나? 역시 예수 믿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달라.”하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회사에 나가도 성실하게 일하고, 정직하게 행하며,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얻기만 하려 하지 않고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세상의 대다수 사람들이 옳은 것을 알지만 잘 가지 않으려고 하는 그 길을 걸을 때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 됩니다. 소금은 녹아야 맛이 나는 법입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맛이 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 부르셨습니다. 어느 회사에서 사람을 보고 “당신은 우리 회사의 빛 같은 존재입니다.” 라는 표현을 말을 했다면 그것은 정말 최고의 칭찬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스스로도 “세상의 빛”이라 소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처럼 되라는 말씀이셨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달은 태양으로부터 받은 빛을 지구에 반사시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달 같아서 스스로는 빛을 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참 빛 되시는 태양 같은 주님의 빛을 받아서 그 빛을 비추면 우리 역시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법에 대한 해석은 한 나라 전체의 삶을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변호사들이 있었다면, 예수님 당시 율법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율법을 가지고 해석하는 권위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다 보니, 율법에 하나 둘씩 전통이 추가 된 것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정통한 서기관들의 권위는 하늘을 찌르는 듯 했습니다. 그들의 해석이 곧 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서기관들이 지은 이러한 법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다하는 자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혹한 율법을 지키려 살아가는 바리새인들을 일반 이스라엘 시민들이 존경하게 된 것이지요.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의 모습을 보고 한탄 하셨습니다. “장님이 장님을 이끌고 있구나…”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정해놓은 전통을 예수님이 지키지 않자 그를 정죄하기 시작했습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도 씻지 않다니?! 안식일에는 가뜩이나 무거운 거 들 수도 없는데 병든 사람을 고치다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볼 떼 예수님은 전통을 어기는 괴씸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17절 말씀을 함께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아니다 내가 율법을 없애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이 율법 되게 하기 위해서 이다. 그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온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이어서 18절에 말씀하시기를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무엇하나도 없어지지 않습니까?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우리나라 말에 왜 님이란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뭐가 된다고 합니까? 전혀 다른 뜻이 됩니다.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히브리어는 마침표 모양의 다게쉬란 점으로 우리나라 한글의 모음을 대신합니다. 점 하나 점 두개 점 세개 이렇게 점 하나에 따라서 글의 의미가 전혀 달라집니다. 따라서 주님은 오늘 율법의 이 점 하나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그대로 이뤄질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 동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의하여 율법 자체 보다는 전통이 더 중요시 여겨졌는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 전통보다 하나님 말씀 자체의 본래 의미들이 더 중요한 것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사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얼마나 율법의 기본정신에서 멀어졌는지 그들은 안식일에 한 남성이 등을 들고 가는 것이 법인가 아닌가를 끊임없이 논쟁했습니다. 이러한 것이 신앙의 쟁점이었다.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규칙과 규정에 그들의 신앙이 묶여 버린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서기관들이 ‘기록한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본래의 의미로 돌려놓으셨습니다. 즉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다! 율법을 완성하러 온 것이다! 하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때로 어떤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보며 “예수님께서 다 완성 하셨네? 그러니까 더 이상 나하고 법하고는 상관없으니까 나는 내 맘대로 살아야지” 하고 오히려 예수님 안 믿는 사람보다 더 자유롭게 죄 짓고 살아가는 방종주의에 빠진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말한 자녀의 잘못을 아버지가 용서해주었다고 한들, 계속해서 거짓말 하는 것은 여전히 나쁜 죄인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뤄주셨다고 한들,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구약에 나오는 양과 소를 잡는 제사와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완성하신 법까지 다시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그것은 십자가에서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들로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법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전히 읽고 듣고 그 가운데 기록된 대로 지켜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전히 다윗의 고백처럼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입니다. 여기서 묵상은 단지 생각하는 묵상이 아니라 어떻게 내가 이 법을 내 삶으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고민의 묵상입니다. 오늘 이 하루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기초하여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