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09 더 지혜로운 선택 (전도서 7장 1-14절)

사람에게 부여된 이름은 단순히 그 사람을 부르는 호칭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을 상징하며, 이름 그 사람 자신과 동일시됩니다. 아무리 값비싼 기름이라 해도 좋은 인격과 인품이 더욱 큰 가치가 있습니다. 1절에서 말하는 좋은 기름은 감람나무 열매에서 채취한 올리브유를 말합니다. 식용, 의약품, 성전 제사용품, 화장품 등등 이스라엘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입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귀하게 여겨졌던 보배로운 기름보다, 사람이 더 성숙한 인격과 인품을 갖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부요함은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이지만, 그 사람의 인품은 더욱 오래 가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좋은 기름을 얻으려고 하겠고, 물질적인 부요함을 목표로 살아가겠지만, 솔로몬은 오히려 의로운 삶을 살아감으로써 좋은 인품, 성숙한 인격, 명예로운 삶을 추구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1절 후반절을 보면 “죽는 날이 태어나는 날보다 낫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을 세상에 대한 비관적인 자세나, ‘죽는 것이 살아 있는 것보다 낫다’는 식의 염세주의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은 2절과 연결 지어 해석해야 합니다. “(전 7:2, 개정)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솔로몬은 죽음 앞에 선 인간의 한계를 떠올리고 있습니다. 늘 그와 같이 우리 삶이 유한하며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간직하고 동시에 죽음 이후의 삶을 위해, 즉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가 참 된 지혜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사람이 기쁨이 가득한 잔칫집에 머물러 있으면 죽음에 대해서 까마득하게 멀리 생각하거나 아예 그 주제에 대해서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초상집에 가 있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아, 인간은 죽는구나? 나도 언젠가는 죽겠구나? 그렇다면 나는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와 같은 식의 생각들이 마음에 자리잡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은 초상집에 가는 자가 잔칫집에 가는 자보다 낫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면에서 1절 후반절 말씀처럼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더 낫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실 누가 슬픔과 눈물 뿐인 장례식이나 상갓집을 가고 싶겠습니까? 사람들은 결혼식이나 아이 돌잔치와 같이 경사가 난 잔칫집을 더 가고 싶어 합니다. 죽음을 직시하는 것은 모두에게 불편한 일이고, 마음을 어둡고 슬프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솔로몬은 초상집에 있는 것이 잔칫집 가는 것보다 낫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초상집에서 인생의 마지막인 죽음을 직시하며, 보다 책임 있고 의미 있는 자세로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4절에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지만,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잔칫집에 있다”고 말한 것이죠.” 즉 지혜자의 마음은 언제라도 그의 삶에 죽음의 그늘이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인생을 허투로 살지 않습니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영원한 것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그냥 하루하루 즐겁게 세상을 살아가면 그만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죽음에 대한 염려나 준비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3절에 솔로몬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때 오는 슬픔이, 세상 죄를 지으며 누리는 경박한 웃음보다 더 낫고,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며 근심하며 사는 것이 오히려 그의 마음에 유익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지혜자는 자신의 영혼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또한 죽음 이후의 삶을 미리 준비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의 마음은 영적 문제에 무관심 합니다. 그저 맹목적, 육신적인 즐거움과 쾌락만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솔로몬은 5절에서 인간의 한계와 죽음을 인지하고 영원이란 관점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육체적인 쾌락과 재물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우매한 자들의 노래소리, 웃음소리를 듣는 것보다 낫다고 평가했습니다. 지혜자의 책망은 들을 때는 마음이 상할 수 있고 찔림과 아픔이 있지만, 지혜자의 책망은 바른 길로 가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들의 노래는 들을 때는 마음에 기쁨이 되고 귀가 즐거울 수 있으나, 허무하고, 무의미한 패망의 길로 이끌어 갑니다. 따라서 우리들도 우매자의 노래가 아니라 지혜자의 책망을 듣고 살 수 있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6절에 “우매한 자들의 웃음 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다고 했습니다. 가시나무는 땔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가시나무에 불을 붙이면 나무 타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그에 비해 불이 급히 타올랐다가 쉽게 꺼져버립니다. 요란스러운 소리에 비해 화력이 좋지 못하고 잠시 동안 타다가 금방 불꽃이 사라져 버립니다. 우매자의 여흥과 기쁨이 그와 같이 요란하고 좋아 보일지 모르지만, 극히 일시적이라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7절에 솔로몬은 탐욕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또한 뇌물이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만듭니다. 이는 물질을 탐하는 마음이 인간이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물질을 탐하다가 사람들이 뻔히 옳은 길을 놔두고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5-7절은 재물을 탐하는 인생의 어리석음을 경계합니다. 또한 한 순간 있다가 없어질 것에 집착하는 삶을 주의시킵니다.

8절에 솔로몬은 일을 마치는 것이 시작하는 것보다 낫다고 선언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착수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사실 그러한 일을 계속해서 꾸준히 성실하게 해내면서 끝까지 열매 맺을 때 비로소 더 큰 가치를 갖게 됩니다. 솔로몬은 우리가 삶에서 좋은 결과물을 얻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노력을 기울여 살 것을 권면합니다. 9절에는 세상에 집착하여 노하는 자들이 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낫습니다.

12절에 솔로몬은 지혜의 그늘 아래 있는 것이 돈의 그늘 아래 있음 보다 더 유익하다고 평가했습니다. 지혜는 사람을 살릴 힘이 있으나, 돈은 사람의 목숨은 살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지혜, 영원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입니다. 마지막 13-14절을 봅시다. 지혜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행하시는 일들을 보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막을 자가 없습니다. 주님이 펴시면 굽힐 자가 없고, 주님이 굽게 하시면 곧게 할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기쁨도 주시고 때로는 고통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날들이 우리가 사는 날 동안 교차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연약한 자들임을 깨닫고 내일을 알 수 없기에 매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도록 하게 하기 위한 것 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돈의 그늘에 들어가서 보호함을 받으려 합니다. 그러나 재물은 결국 사라져 버릴 것이고, 그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그늘 아래 들어가서 보호함을 받으려 합니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보호 받고 생명과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