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30 죽음 앞에서는 다 평등합니다 (전도서 2장 12-17절)


솔로몬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고 보람 차고 행복한 인생인가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지혜와 지식을 얻기 위해 학문 연구에 매진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또한 지혜와 지식이 쌓일수록 오히려 근심이 더해간다는 것을 솔로몬은 깨달았습니다. 이에 솔로몬은 육체적 탐욕에서 인생의 가치를 발견하고자 했습니다. 술에 취하여 살아 보기도 하고, 육체적 쾌락을 모든 지 금하지 아니하고 다 해봤습니다. 그러나 육체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사는 것은 미친 짓임을 알았습니다. 그것도 허무했습니다. 그래서 세번째로 사업을 크게 벌려 보았습니다. 성도 지어보고, 다른 건축물들도 지어 보았습니다. 포도원, 논밭, 과수원 차렸습니다. 가축도 그 숫자를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사서 길러 봤습니다. 결국 솔로몬은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금은보화, 갖가지 진귀한 보물들 다 모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갖고 싶은 것 다 사고,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을 다 누려 봤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삶도 결국에는 허무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일 후에 솔로몬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자신이 무슨 일을 하든지, 기껏해야 결국 이미 그보다 앞서 세상을 다스리던 왕들이 하던 일을 따라할 뿐입니다. 솔로몬 앞에도 지혜를 추구한 왕이 있었고, 육체적 탐욕에 빠져 살아간 왕이 있었고, 국가적 단위의 비즈니스에 성공한 왕도 있었습니다. 솔로몬이 무엇을 해도 이미 그 이전에 살았던 왕들이 이미 오래 전에 다 하던 일입니다. 솔로몬이 생각해 보니까 이 세상에는 지혜로운 왕이 있다가 미련한 왕이 있다가 이를 반복합니다. 이런 사실이 너무 허무하다는 거에요. 솔로몬은 자신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결국에는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살다가 허무하게 죽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기서 솔로몬은 한 가지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나처럼 지혜로운 사람이나, 미련한 사람이나 결국에는 다 똑 같은 인생이구나?” 13절을 봅시다. “빛이 어둠보다 나은 것처럼 지혜가 어리석은 것보다 낫다는 것을 내가 알았다.” 이처럼 솔로몬은 지혜가 어리석은 것보다는 낫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14절 후반절을 보면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뭐가 다르냐? 지혜자나 우매자나 그들 모두가 당하는 일이 모두 같은 것 아니냐!” 15절, “우매자 곧 어리석은 자에게 일어나는 일을 나도 당할 것인데, 내가 지혜가 있다 한들 그게 나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아, 지혜롭다는 것도 결국에는 아무 쓸모가 없구나! 아, 이것도 허무하다!” 솔로몬의 말 대로 지혜롭다고 인생에 고통이 없지 않습니다. 우매자도 좋은 날에는 웃고, 슬픈 날에는 울고 그렇게 살다가 병들어 죽습니다. 지혜자도 똑같다는 거에요. 좋은 날에는 웃고, 슬픈 날에는 울고 그렇게 살다 병들어 죽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 사람들은 우매자가 있었는지, 지혜자가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솔로몬이 보니까 지혜자의 죽음과 우매자의 죽음이 똑같습니다. 둘의 결말이 같아요. 그래서 17절에 솔로몬이 허탈해 하며 깊은 허무함에 빠지게 됩니다. “아, 살아서 뭐하냐? 살기 싫다. 어차피 해 아래서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다 괴로운 일 뿐이다. 모두 다 지나가면 사라지고 말 허무한 것들 뿐이로다! 다 바람을 잡으려고 하는 것 같이 쓸데없는 일들 뿐이다.”
솔로몬이 빠진 딜레마가 무엇입니까? 허무주의입니다. 정말 재미있는 TV 드라마를 찾았어요. 16부작 24부작 엄청 재미나게 보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화를 보고 끝이 났어요. 그 끝에 오는 공허함 있죠? “아, 뭐 또 재미난 것 없나?” 우리는 무엇을 찾습니까? ‘다음 것’을 찾습니다. 그렇게 다음 것 찾아 소비하고, 그거 끝나면 또 다음 것 찾아서 소비하고… 이런 식으로 다음 것 찾아다니다가 죽는 게 인생이라는 거에요. 요즘 유튜브 보세요. 영상 하나 보면 버튼 안 눌러도 다음 영상 자동으로 재생 되는 기능이 있습니다. 페이스북 보세요. 손가락으로 안 넘겨도 자동으로 다음 화면으로 넘어갑니다. 공허감과 허무함을 느끼기 싫어하여 쉼 없이 ‘다음 것’을 찾아 헤매는 인간의 심리를 너무 잘 아는 거죠. 그런데 그런 곳에는 사실 참된 기쁨과 즐거움이 없어요.
아무리 목말라도 소금이 있는 바닷물을 마실 수는 없습니다. 그거 마시면 더 목마르고 갈증만 납니다. 세상이 바닷물 같아요. 목 마를 때는 생수를 마셔야 합니다. 그 생수를 누가 주십니까? 예수님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이 여자 이혼만 4 번 했습니다. 첫 번째 남자 만났는데 바닷물 같은 남자 만났어요. 안 맞아요. 결혼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더 불행한 거에요. 그래서 이혼했어요. 그래서 다음 남자를 찾았어요. 이번에는 결혼하면 정말 행복할 줄 알았는데 또 불행했어요. 그렇게 세 번 네 번 결혼하고 이혼했어요. 그래도 혼자 살 수 없어서 또 남자를 만났어요. 이번에는 결혼은 안 하고 동거하며 삽니다. 여자가 결혼을 4번이나 했다? 사마리아 여자 얼마나 삶이 기구합니까? 자기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려고 정말 많이 노력했을 거에요. 그러나 바닷물만 마신 인생입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요 4:14, 개정)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사라집니다. 그래서 허무합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은 영원하십니다. 그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함께 하는 자는 그 안에서 생수의 강이 쏟아지기 때문에 인생의 공허와 허무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TV 드라마가 아무리 재미 있어도요. 계속 보면 어느 순간 질립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스포츠, 운동, 영화, 게임 뭐든지 아무리 재미 있어도, 계속하도록 내비 두면 질리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왜냐면 결국 그 패턴이 똑같거든요. 재미가 떨어집니다. 그래서 또 새로운 것, 다음 것을 찾게 됩니다. 연애도 그렇죠? 처음에는 그 사람이 너무 좋아서 낮이나 밤이나 남자 친구, 여자 친구 생각만 하죠? 낮이든 밤이든 떨어지기 싫고 계속 같이 있고 싶어요. 한 번 그 두 사람 가만히 지켜보세요. 시간이 지나면, 이제 서로 같이 안 있으려고 합니다. 왜요? 상대방이 익숙해지면 편안함이 오고, 편안함이 오면 반복되다 보니 새로울 게 없어 상대방에게서 느껴지는 재미가 없거든요. 끊임없이 새로운 것, 다음 것을 원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세상이 허무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떠세요?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우리 주님은 날마다 새로우십니다. 매 순간 새로우십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함께 하면 질릴 틈이 없습니다. 공허하지 않습니다. 허무하지 않습니다. 늘 새로우신 은혜를 주시니, 우리는 영원토록 주 안에서 끊이지 않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 세상의 허무함을 극복하는 방법은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날마다 새로우신 하나님을 섬기며 주님과 교제하며 살아가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날마다 새로운 은혜로 우리 영혼이 풍성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혜자도 미련한 자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둘다 기억되지 못하고 잊혀집니다. 그의 수고도, 그의 땀도, 노력도, 그의 지혜도 다 사라집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수고는 손으로 바람을 잡으려고 하는 것처럼 공허하고 허무합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을 붙잡고 사는 사람은 이 허무함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새로우신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인생이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그는 날마다 주님 안에서 새로운 기쁨과 즐거움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