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08 하나님의 구원과 승리 (다니엘 3장 19-30절)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이 꿈에서 보았던 신상과 비슷한 모양을 갖고 있는 금 신상을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서 3장 1절에 이 신상의 크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신상의 높이가 육십 규빗 입니다. 고가 60규빗이라는 것은 그 높이가 27미터(88피트), 광이 여섯 규빗이라는 것은 너비가 2,7미터(8.8피트) 라는 뜻 입니다. 높이 27M, 너비 3M에 해당하는 큰 금 신상을 제작했습니다. 그 크기를 대략적으로 계산해보면 한국에 있는 아파트 8-9층 높이의 신상입니다. 신상의 크기가 거대하다 보니 멀리서도 잘 보였습니다. 왕은 그 신상을 평지에 두었습니다. 신상 제작 프로젝트가 끝났습니다. 만들어는 놓았는데 보는 사람이 없으면 얼마나 재미가 없겠습니까? 그래서 느부갓네살 왕은 대규모의 신상 제막식을 준비했습니다. 바벨론 제국이 다스리는 전국에 있는 관원들과 공무원들 모조리 불러 들였습니다. “총독, 지방 장관, 군사령관, 왕의 고문, 재무관, 재판관, 치안 판사, 그 밖에 각 도의 모든 관리들이 낙성 예식에 참석”했습니다. 드넓은 평지 위에 신상이 세워져 있고, 전국에서 모인 문무 대신들이 신상 앞에 모여 있습니다. 모두가 지켜 보는 가운데 왕의 전령관이 나와 큰소리로 왕의 명령을 전합니다. “이 곳에 모인 여러 민족과 백성 여러분, 앞으로 여러분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그 밖의 악기 소리를 들으면 엎드려 느부갓네살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십시오. 이것이 왕의 명령입니다.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않는 사람은 즉시 뜨겁게 타는 용광로에 던져질 것입니다.” 왕이 세운 신상에게 절하므로 왕에 대한 충성을 나타내라는 왕의 명령이선포된 것입니다. 전국에서 모인 수많은 관리들에게 이 명령은 뭐 그리 어렵거나 힘든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신상에게 절하므로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에게는 이보다 더 끔찍한 명령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려서부터 율법을 통해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왕이 세운 금 신상에 절하는 것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일임을 이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고 뜨겁게 타는 풀무 불에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모면하기 위해 눈 딱 한 번 감고 금 신상에 절할 것인가?” 이 삶과 죽음의 선택이 다니엘의 세 친구 앞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핍박이 없을 때 하나님 믿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협박 속에서 하나님 믿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느부갓네살 왕이 만든 금 신상에게 절하면 삽니다. 이 얼마나 쉬운 일입니까? 눈 딱 한 번 감고 절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리며 마음 속에 많은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 눈 한 번 딱 감고 죄를 지을 때가 많습니까? ‘세상 사람들 다 하는데 나도 하면 안되나? 이렇게 안 하면 죽는데 어떻게 살아?’ 이런 식으로 자기 합리화를 시키며 세상과 타협하며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상황도 비슷합니다. 특별히 이들을 눈 여겨 보는 사람도 없고, 금 신상에게 절한다고 해서 뭐라고 비난 할 사람도 주변에 없습니다. 전국에서 모인 모든 문무대신들이 신상에게 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다 한 길로 가도 신앙은 ‘NO’ 라고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이 길로 가지 않으면 반드시 손해를 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그 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길이라면 과감하게 방향을 틀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손실과 피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이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무엇이 옳은 길인지 몰라서 못 가는 것이 아니라, 옳은 길을 너무나도 잘 아는데, 그 길을 가는 것이 두려워서 못 갑니다. 옳은 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세 친구들에게 있어서 옳은 길은 바로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걷기 위해서는 그들의 목숨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죽음 앞에서 그 누가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 친구들에게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죽는 것보다 더 싫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아닌 다른 우상에게 경배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신앙의 양심을 따라 왕의 신상에 절하기를 거절했습니다. 마침 유대인들에게 질투심을 느끼고 원한을 품고 있던 갈대아 관리들이 이 모습을 목격하고 느부갓네살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크게 노하여 당장 이 세 사람을 끌어 오라 명합니다. 세 청년이 왕 앞에 불러오자 왕이 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들을 섬기지 않고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는다는 말이 사실이냐? 그렇다면 이제라도 너희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그 밖의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라. 만일 이번에도 너희가 절하지 않는다면 너희를 뜨겁게 타는 용광로에 던져 넣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어떤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 내겠느냐?’” 왕은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더 주었습니다. 이 보다 더 달콤한 유혹이 또 어디 있습니까? 이번에는 ‘YES’ 한 마디만 하면 목숨을 구원 받습니다. 지금이라도 금 신상에게 절하겠다고 하면 풀무불에 들어가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요리하기 위해서 주방에서 물을 끓이다가 실수로 물을 피부에 쏟으면 얼마나 아픕니까? 전신에 화상을 입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 3도 화상보다 고통스럽고 공포스러운 경험은 없다.” 하물며 온 몸이 풀무 불에 타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풀무불에서 타서 죽는 것은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 죽는 것이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가장 고통스럽게 타다가 죽어야 합니다. 그러니 느부갓네살이 지금이라도 금 신상에게 절하면 살려주겠다고 말했을 때 이 상황은 세 사람에게도 엄청난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일언지하에 왕의 유혹스런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3: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3:17)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어쩌면 이 시퍼렇게 젊은 청년들이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의 흐트림 없이 당당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믿음이 흔들리면 우리의 삶도 흔들립니다. 믿음이 흔들리면, 조그마한 어려움에도 마음이 낙심되고, 삶이 무거운 짐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믿음이 흔들리면 삶도 덩달아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아무리 삶이 힘들고 어렵고, 고난이 파도처럼 밀려와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굳건하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나타냈습니다. 그들은 입을 열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먼저 선포했습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보여준 믿음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더 큰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1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3:18)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오늘 18절의 두 단어는 너무도 유명하여 우리가 자주 부르던 복음성가의 제목으로도 쓰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 비록 내 삶이 내가 원하고 계획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을지라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내가 하나님만을 섬기며 하나님께 감사와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저를 한 번 따라 해보시겠습니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을 따르겠습니다.” “하나님, 저 이거 이거 해주세요.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 하나님 저 이거 도와주세요.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만 경배하겠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의 마지막 호의조차 저버린 이 세 청년의 대답에 크게 분을 냅니다. 결국 이 세 젊은이는 두 손이 꽁꽁 묵인채로 결박된 채 병사들에 의해 풀무불을 향하여 끌려갑니다. 우리가 왜 찜질방 가도 ‘아..이방엔 큰 맘 먹고 들어가야 겠구나?’하고 생각이 드는 그런 뜨거운 방이 있죠? 들어가서 1분만 있어도 숨쉬기가 힘든 불가마가 놓여 있는 방입니다. 그런 방도 들어가기 주저 되는데 지금 이 세 사람이 끌려가는 그 불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이 세 사람을 불에 넣으려고 끌고 가던 병사가 불에 타 죽었습니다. 성경에는 이들이 들어가는 불을 가리켜 “극렬히 타는 풀무”불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불에 들어가면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살아 돌아올 확률이 없다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의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으면 이렇게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의 본보기로 삼으려 했습니다.
세 친구는 뜨거운 풀무 불에 던져졌습니다. 이 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분명 세 사람이 불에 들어갔으나 네 사람이 불 가운데 있었습니다. 25절 말씀을 보니 그 넷째 사람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다고 했습니다. 천사들의 모습과 흡사했다는 뜻입니다. 이 때 느부갓네살 왕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왕이 부르자 불 속에 들어갔던 세 친구가 불 가운데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왕과 총독과 모든 행정관들과 병사들이 보니 이 세사람은 뜨겁게 타오르는 풀무 불에 들어갔으나 불이 몸을 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겉옷에 그으름 난 자국이나 불에 탄 냄새도 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느부갓네살 왕의 반응을 봅시다. 28절입니다. “(단 3:28, 개정)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하나님을 믿지 않던 느부갓네살 왕도 세 친구를 보호하시고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29절 후반절에 나오는 왕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과 승리는 오직 주께 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 섬기는 일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끝까지 주님만 따라갑시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니 반드시 우리에게 큰 구원과 놀라운 승리를 안겨주실 것입니다. 극히 타는 뜨거운 풀무 불 속에서도 세 친구를 능히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모든 불 같은 시련들 속에서도 능히 구원하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