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03 바벨론의 민낯 (다니엘 2장 1-16절)

“옛 말에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은 아무리 깊어도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보면 물이 흘러가는 길을 알 수 있지만, 사람 속에 있는 마음은 도저히 알기가 어렵다는 의미지요. 사실 사람이란 존재는 단편적이지 않습니다. 착한 거 같은데 또 나쁜 거 같고, 나쁜데 같은 데 또 어느 날은 착해 보입니다. 평생을 함께 산 가족들도 살다보면 또 새로운 모습이 보입니다. 사람은 양파 같아서 까도 까도 그 속에 뭔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사람의 내면이 있지요. 그런데 정말 이 사람이 정말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알려면 그 사람이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을 때를 보면 압니다. 좋을 때는 다 좋은 척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과 신음이 나는 어려운 환경에 처하면 그 사람의 본성이 올라오게 됩니다. 늘 밝게만 웃던 사람이 고난의 환경에 처하자 짜증을 부리고 화를 내기 시작합니다. 정직한 줄만 알았던 사람이 위기를 모면코자 부정을 저지릅니다. 고난과 위기야말로 사람의 진모를 나타냅니다. 그러고 보면 인생에 찾아오는 “위기”이야말로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가려주는 시금석이지요. 오늘 우리는 함께 저 위대한 신앙의 선배 다니엘은 어떻게 이 위기를 맞이했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오늘 이야기를 들어가기 전에 1장에서 왕의 진미를 거부한 다니엘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1장 15절을 보니까요, (1:15)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모든 소년보다 나아 보인지라” 하나님께서 다니엘과 그 친구들에게 건강을 주십니다. 건강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17절을 보니 (1:17)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몸만 건강한 것이 아니라 머리도 건강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네 소년을 지혜롭게 하신 것이지요. 또 19절에 보니 (1:19) “왕이 그들과 말하여 보매 무리 중에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은 자 없으므로 그들로 왕 앞에 모시게 하고” 그들은 왕 앞에 나아갑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들을 모든 이들 가운데 높이신 것입니다. 건강과 지혜와 영화로움 이것이 뜻을 정하여 구별된 삶은 산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그런데 오늘 2장에 들어와서는 다시 위기의 전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삶은 좋을 때가 있으면, 슬플 때도 있는 법이지요. 스스로를 구별하여 주님을 섬기던 다니엘에게도 위기는 찾아왔습니다. 위기는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지요. 바다 위에서 파도가 일어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듯이 인생이란 배를 항해하는 우리 모두에게 위기의 파도가 찾아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입니다. 다니엘이 당황 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말씀 2장 1절을 보니 바벨론이란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는 느부갓네살 왕이 꿈에서 깨어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꿈을 꾸긴 했는데, 뭔가 너무 찜찜한 꿈. 그냥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신비스런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봐도 그 꿈의 의미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꾼 꿈이 보통 꿈은 아니란 걸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3절에 보면 그의 ‘번민’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그는 자신의 꿈을 해석해 줄 박수와 술객을 부릅니다. 고상하게 들리는 단어들입니다만 오늘 날로 말하면 주술사와 점쟁이들을 부른 것이죠. 왕 앞에 나아간 점쟁이들이 말하기를 “왕이시여 우리에게 꿈을 알려주시면 저희가 그 꿈을 해몽해드리겠습니다.”하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왕은 쉽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왕은 해석만을 요구하지 않고 “꿈과 그 해석”을 보이라고 합니다. 5절 말씀에 꿈과 그 해석을 보이지 못하면 죽음이 놓여 있습니다. 이 얼마나 황당한 요구입니까? 해석하는 것도 어려운데 꿈을 맞춰보라니.
“Jeopardy”라는 미국의 인기 프로그램을 따라 준비가 되어 있는데요. 1964년부터 시작된 이 “Jeopardy”가 다른 퀴즈 프로그램과 가장 큰 차이가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퀴즈 프로그램들은 사회자가 질문을 주고 답을 맞추는 데 반해, Jeopardy는 답을 먼저 주고 질문을 맞추는 게임입니다. 예를 들면 겨울이란 단어를 보여주고 참가자가 “가을 다음에 오는 계절은?” 이란 질문을 쓰면 정답이 되지요. 그런데 만약 사회자가 어떠한 질문도 단어도 심지어 아무런 힌트도 주지 않은 채 정답을 맞추라 한다면 얼마나 황당할까요? 바로 이 느부갓네살 왕이 지금 자신의 박수와 술객들에게 하는 것이 그러한 명령입니다. 꿈도 그 해석도 알려주지 않고 맞추어보라고 하는 것이지요. 왕은 자신이 꿈을 이야기하면 그것에 맞추어 해석하려는 술객들의 잔꾀를 배제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왕의 명령은 그 누가 들어도 황당한 요구입니다.
그러자 그 점술쟁이들이 다시 한 번 더 왕께 꿈을 말해달라 청합니다. 10절입니다. ‘(2:10) “왕께서 물으시는 것을 말씀드릴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위대하고 강한 왕이었다 해도 마법사나 주술사나 바벨론 점성술사에게 그렇게 물어본 왕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왕께서는 너무 어려운 일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인간 세계에 살지 않고 다른 세계에 사는 신이어야만 왕께 그것을 알려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종들은 이것이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한 일임을 왕에게 알렸습니다.
자신의 꿈과 해석을 알려주는 것을 점술가들이 거절하자, 느부갓네살 왕이 크게 진노합니다. 그리고 바벨론의 모든 문관들 점술가들은 다 사형에 처하라 명합니다. 여러분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어떻게 자기의 꿈을 모른다고 그 거대한 국사의 모든 박사들을 다 죽이려 합니까?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느부갓네살 왕은 상당히 “다혈질”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다혈질인 사람들이 종종 있죠? 화가 나면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거죠. 사실 지금 자기가 죽이려는 이 사람들 없이는 국정이 운영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뒤 안 가리고 지금 이런 무시한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 감정적일 때 내리는 결정들은 대부분 극단적입니다. 우리 나라 표현에도 ‘홧김에’라는 말이 이를 잘 나타냅니다. ‘홧김에’ 내뱉은 말, ‘홧김에’ 선택한 행동은 파괴적인 힘을 갖습니다. 신문이나 뉴스를 봐도 홧김에 저지른 살인 사건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홧김에 던진 물건에 사람이 다치고 홧김에 던진 말에 사람들의 마음에 잊지 못할 상처를 남깁니다. 이처럼 화난 사람은 검은 연기를 뿜으며 달리는 기차처럼 끊어진 선로 앞에서도 멈추지 못합니다. 따라서 “분”이란 감정이 나를 다스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성품입니다. 한국 말에는 분이란 감정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분을 진정시키다.”란 표현도 있지만 “분을 다스리다.” 혹은 “분을 참다.” “분을 이기다.”란 표현들이 있습니다. 분노가 나를 다스리려 할 때 그 마음과 싸워 이기는 것이지요. 제 주변에도 참 사람이 좋고 능력도 출중한데 자기의 분을 이기지 못하여 어려움을 당하는 분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분”에 사로 잡히지 않는 사람. ‘분’을 다스리는 사람이야말로 성숙한 사람입니다. 우리 옆사람을 보고 ‘분’을 다스립시다. 하고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 왕은 분을 이기지 못합니다. 분에 사로잡혀 판단력이 흐려진 왕은 바벨론의 모든 박수들을 죽이라는 긴급한 명령을 내립니다. 그 명단 안에 다름 아닌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이 포함됩니다. 13절 말씀에 보니 다니엘과 그 친구들도 죽이려고 사람들이 그들을 찾아 다닙니다.
지금 다니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정말 억울하죠. 자기가 실수나 잘 못해서 죽는다면 그래도 조금 덜 억울할 탠데, 자기가 꾼 꿈도 아니요, 왕이 꾼 꿈으로 인해 이렇게 사형에 처하게 된다니 억울하고 화가 날만도 합니다. 만약 다니엘 역시 느부갓네살 왕처럼 분에 사로잡혔다면, 그 역시 미련하고 후회할만한 결정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이 모든 혼돈 가운데 차분하게 마음을 다스립니다. ‘분’ 곧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15절에 왕의 장관 아리옥에게 “왕의 명령이 어찌 이렇게 급합니까?” 하고 차분하게 물으며 일의 자초지정을 살핍니다. 이 모든 소란이 왕의 꿈과 해석에 달려있음을 다니엘이 듣게 됩니다. 여러분이 만약 다니엘이었다면 어떻게 하셨을 거 같아요? “아 꿈과 해석을 보이라…그래…” 하고 한 숨을 쉬고 ‘꿈과 해석을 어떻게 알아맞혀? 어쩔수 없지…’ 하고 포기하진 않았을까요? 저라면 그런 마음도 들었을 거 같아요. 꿈과 해석을 맞추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그러나 다니엘은 분에 쌓인 왕에게 담대하게 나아갑니다. 그리고 또 다시 그 앞에서 차분하게 얼마 동안의 기한을 주시면 왕에게 그 해석을 보이겠노라 이야기 합니다. 다니엘이 참 대단하지요?
사실 술객들과 박수들의 대화법과 다니엘의 대화법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술객들과 박수들은 10-11절에 말하길 “왕께서 물으시는 것을 말씀드릴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위대하고 강한 왕이었다 해도 마법사나 주술사나 바벨론 점성술사에게 그렇게 물어본 왕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왕께서는 너무 어려운 일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인간 세계에 살지 않고 다른 세계에 사는 신이어야만 왕께 그것을 알려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말합니다. 간접적으로 왕에게 “당신의 명령은 터무니 없는 것입니다.”고 이야기 한 것이지요. 이렇식으로 말하니까 당시 절대권력을 뽐내고 있던 느부갓네살 왕이 화가 난 것이지요.
그러나 다니엘은 어때요? 일단 되든 안되는 제가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하고 왕에게 겸손하게 반응한 것입니다. 필립스라는 회사가 한국에서 광고를 할 때 꼭 넣는 카피구절이 하나 있어요.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듭니다.” 명품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도 사실 작은 차이들이 쌓이고 쌓여 결정되는 것이지요. 작은 차이를 만드는 것 역시 결코 쉽지 않음을 명심하고 늘 스스로를 훈련해야 합니다. 대화를 나누는 작은 태도에서부터 명품 그리스도인은 차이가 납니다. 다니엘은 위기 가운데 하나님을 초청했습니다.
지금 왕 앞에 나아가 시간을 달라고 청한 다니엘은 아직 하나님으로부터 꿈과 해석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어디서 이런 담대함이 있을 수 있었을까요? 그는 지난 날 애굽 왕 바로의 꿈을 해석한 요셉의 이야기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래 비록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라면 하실 수 있으실꺼야.” 하는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왕에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