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31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 시리즈 (1) 당신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누가복음 10장 25-37절)

서론. 우리는 어려운 이들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살고 계신 ‘하형록’이란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지난 1969년도에 미국으로 이민을 왔습니다. 당시 친구들에게 피부색이 다른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놀림을 받고 인종차별을 당하며 자라야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미국에서 작은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한인이 많지 않던 때로 교회 개척 후에도 살림이 힘들어 13살부터 공부를 하면서 동시에 일도 해야 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버지와 야간 청소를 다니고, 페인트칠 하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때로는 사다리를 타고 높은 건물 꼭대기에 올라가 오래된 페인트를 벗겨내는 고된 일도 했습니다. 노인 케어센터에서 청소하고 빨래 수거하는 일, 미국 교회 청소 일 등 산전수전을 다 겪어야 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미국의 한 건축회사에 취직하게 됩니다. 그는 언제나 지시 받은 것보다 더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상사가 10개 하라고 하면 11개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상사가 물을 떠오라고 하면 보통은 컵에 물을 부어서 갖다 주지만, 이 분은 냅킨까지 챙겨서 가져 갔습니다. 남들과는 뭐 하나라도 달랐던 것이죠. 일을 할 때도 정해진 시간이 되기 전에 마치도록 노력했습니다. 매년 승진을 거듭해서 수 백명의 직원을 둔 회사에서 20대 말에 회사 중역이 되었습니다. 회사 최연소 임원이 되었습니다. 직당 다니며 돈도 많이 모아서 집도 몇 채나 사두었습니다. 사는 집도 큰 집을 새로 장만했습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승승장구하던 인생이었습니다. 이대로만 가면 10년 후에는 미국 굴지의 건축 설계 회사의 대표가 될 수도 있겠다는 꿈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돈도 많이 벌 수 있겠다는 계산도 나왔습니다. 눈 앞에 명예와 직위와 돈이 보이자 그것을 향해 전력질주 했습니다.
그렇게 성공을 위해서 숨 가쁘게 살아가던 어느 날 그의 삶에 큰 사건이 찾아왔습니다. 1999년 가을 뉴욕에 있는 클라이언트를 만나러 가기 위해 시원하게 뻗은 고속도로를 매우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아침부터 온 몸에 계속해서 진땀이 나고 있었습니다. ‘그냥 가벼운 몸살이겠거니’ 하고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갑자기 눈 앞이 아득해 지면서 커다란 글씨로 쓰여진 고속도로의 안내판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고속도로 운전 중에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이후 부랴부랴 병원에 도착한 그는 수술실로 옮겨서 ‘심박조율기’(pacemaker)를 달았습니다. 원인을 알아보니 심장의 근육이 매우 약하고 ‘심실빈맥’(Ventricular tachycardia)이라는 위험한 증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심장이 불시에 빠른 속도로 계속 뛰는 증상을 말하는데, 심한 경우 호흡을 할 수 없게 되어 숨이 막혀 죽는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고속도로에서 기절한 이후 입원한 병원에서 이 분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게 되었습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어렸을 때부터 교회 다녔지만 여태까지 태어나서 한 번도 성경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입원한 이후로는 정신이 깨어 있는 동안 계속해서 성경만 봤습니다. 처음에는 영어로 읽고, 두 번째는 한글로 읽고, 세 번째는 주석을 찾아가며 읽었습니다. 이 때 이 분이 성경을 읽다가 하나 깨달은 사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은 선물로 주시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그 선물을 이웃에게 나누어야 하는구나?” 퇴원한 이후 완전 새로운 사람이 된 하형록씨는 건축회사를 창업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성경에서 발견한 말씀에 의거하여 새로 시작할 회사의 정신을 다음과 같이 만들었습니다. “We exist to help those in need”(우리는 어려운 이들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본사를 둔 주차빌딩 건축회사 “팀하스”(Tim Haahs)의 창업주 하형록 회장의 간증 이야기입니다. 오바마 정부 시절 건축자문 위원으로 뽑힐 정도로 미국 사회에서도 인정받는 분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의 회사 [팀하스]는 ‘미국 젊은이들이 가장 일하고 싶어 하는 회사 중 하나’로 뽑힙니다. 오날날도 새로운 직원을 뽑으면 오리엔테이션 때 하형록 회장이 성경에서 찾은 그 원리를 설명하여 그들이 성경의 원리에 공감하고 동참하도록 설득합니다. “We exist to help those in need”(우리는 어려운 이들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
하형록 회장이 성경에서 발견한 원리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구원받은 우리들을 주께 받은 은혜의 선물들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럼 우리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함께 살펴봅시다.

[말씀의 지평] 
1. 율법교사의 첫 번째 질문 –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오늘 본문에는 한 율법교사 등장합니다. 율법교사는 율법을 연구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전문가입니다. 평생 구약성경을 연구해 왔을 것이고, 그는 이스라엘과 유대의 전통에 대해서도 익히 잘 아는 학자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권위 있는 신학교 교수 즈음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이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이단 취급했습니다.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율법의 핵심 내용에 대해서 질문함으로써 그의 입에서 이단적인 발언들이 나오면 꼬투리 잡아 예수님을 정죄하려고 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율법교사가 스스로 답을 하도록 그에 되물으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이에 율법교사가 성경에 대한 지식을 자랑하듯 대답했습니다. “‘네 모든 마음과 모든 목숨과 모든 힘과 모든 뜻을 다해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였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율법교사는 온 마음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대답이 옳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평생 동안 단 한 순간도 예외 없이 전심을 다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만 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행함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후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2. 율법교사의 두 번째 질문 –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율법교사는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사랑을 다 베풀었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은근슬쩍 예수님에게 그러한 사실을 자랑하고 나타내기 위하여 누가 자기의 이웃인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면 누가 제 이웃입니까?” 예수님은 이웃이 유대인 동족에 한정된다고 믿고 있는 이 율법교사에게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 율법교사의 교만과 위선을 깨트려질 만큼의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이 이야기가 바로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입니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두고 갔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을 내려가는데 그 사람을 보더니 반대쪽으로 지나갔습니다. 또 때마침 한 레위 사람도 그곳에 이르러 그 사람을 보더니 반대쪽으로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가까이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바르고 상처를 싸매었습니다. 그러고는 그 사람을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에 데려가 잘 보살펴 주었습니다. 이튿날 사마리아 사람은 여관 주인에게 2데나리온(노동자의 이틀 치 삯)을 주며 “저 사람을 잘 돌봐 주십시오. 돈이 더 들면 내가 돌아와서 갚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예수님은 자신은 이웃을 사랑을 실천하며 살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율법교사에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이 세 사람 중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라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의 이 대답에 율법교사는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평생 사마리아인을 이웃으로 생각해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방인들과 피가 섞인 혼혈인입니다. 순수 혈통의 아브라함 자손이 아닙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고 그들을 무시했으며 심지어 그들을 개처럼 취급했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하고 예수님께서 물어보셨을 때, 율법교사는 차마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유대인을 도와준 이웃이었다고 말하기가 싫었습니다. 그에게 이웃은 오직 유대인 뿐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이웃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자신이 사마리아인이 이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가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자기 나름대로 실천하고 살아왔다는 자부심이 다 무너져 내려 버립니다. 그러나 또한 율법교사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옳다는 것도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끝내 그는 “사마리아인입니다”하고 그 이름을 자기 입에 담기를 꺼려하고 마지 못해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가 가지고 있던 잘못된 이웃의 개념을 완전히 깨트려 버리셨습니다. 그는 유대인 동족만을 이웃으로 제한적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시 유대인들이 극히 혐오하고 깔보고 무시했던 사마리아인까지도 그의 이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청중의 지평]
1. 누구의 이웃이 되어 줄 것인가?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누가 내 이웃입니까?”(Who is my neighbor?)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관점을 바꾸어 “누가 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Whose neighbor should I be?)하고 물으셨습니다. 우리들도 율법교사처럼 “누가 내 이웃인가?”라는 질문을 물어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 줄 것인가?”라고 물어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주었던 것처럼, 우리가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그들의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이웃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떤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을 구제하고, 친절과 호의를 베풀며, 사랑과 자비의 정신을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만일 이 질문에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이름이나 얼굴이 없다면 우리 삶에는 이웃 사랑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수평적인 사랑을 이야기하면 가족에 머무를 때가 많습니다. 혹은 더 나아가면 교회 안에만 머무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세상을 향해 뻗어 나가는 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지난날 원수처럼 여기며 살아왔던 그 사람도 우리가 자비의 정신을 몸소 실천할 때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2.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오늘 본문의 핵심 메세지는 37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now go and do the same.) 예수님께서는 우리들도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어려운 자들을 섬기고 돌보는 참된 이웃이 되는 삶을 살아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 어떠한 관점으로 사람을 바라보는지가 중요합니다. 사람을 내가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사람을 무거운 짐짝처럼 취급해서도 안 됩니다. 어떤 분들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희생하거나 섬기지 아니하고 무조건 자기가 이익을 취하려고만 합니다. 이런 분들은 양의 탈을 쓴 늑대와 같습니다. 처음에는 잘해주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상처만 남게 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약자를 골치거리로 생각합니다. “아, 저 사람하고 잘못 엮이면 안 되. 저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내 시간 빼앗기고, 에너지 빼앗기고, 내 삶만 피곤해져. 저런 부류의 사람은 피해야 돼.” 여전히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고집과 태도 때문에, 삶의 고통 당한 자들을 봐도 그들의 상처를 보듬어 줄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사실 병들고 상처받은 분들이 오는 곳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을 짐짝처럼 생각하고, 상처 입은 영적 환자들을 골치거리로 취급한다면 어찌 그 상처받은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일이 일어나며, 어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의 모습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앞서 소개한 [팀하스] 건축회사의 모토 기억하십니까? “We exist to help those in need”(우리는 어려운 이들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 성경에서 나온 삶의 원리입니다. 이러한 정신과 태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르치는 우리 코너스톤장로교회의 정신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단순히 우리만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기쁨과 즐거움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강도들에게 (여리고로 내려가던) 사람은 약탈의 대상이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강도 만난 사람은 골칫거리였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에게 강도 만난 사람은 사랑과 자비의 대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상처 입은 사람들을 사랑과 자비의 시선으로 바라보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과 같은 시선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들고 고통에 빠진 자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시고 그들에게 손을 뻗으셨습니다. 우리의 손과 발이 그와 같이 이 시대의 또 다른 가난하고 병들고 외로운 이들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 성도들에게 이와 같은 삶을 살아가라고 권면한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도행전 20장 35절 말씀입니다. “(행 20:35) [쉬운성경] 나는 모든 일에서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였습니다. 여러분은 저처럼 열심히 일해서 약한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또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눠주는 삶이 받는 삶보다 행복한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진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행복한 삶을 사는 비결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이들을 섬기고 도우며 살 때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이 놀라운 진리를 꼭 기억하셔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눠주는 이웃으로 살아가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은혜로 행복으로 인도하시는 아름답고 복된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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