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21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 가운데 있으니 (요한계시록 21장 22절 -22장 5절)

우리는 계속해서 새예루살렘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신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될 천국을 의미합니다. 본래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하면 가장 유명한 건물이 성전 입니다.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대표적인 장소 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제 새벽예배 때도 잠깐 살펴보았습니다만, 새 예루살렘의 특징 중 하나가 성전이 없습니다. 새 예루살렘에 성전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조금 전 말씀 드린 것처럼 본래 성전이라는 공간은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 하는 곳 입니다. 따라서 생각해보면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따로 필요하지가 않은 것이죠. 왜냐하면 새 예루살렘에는 하나님과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 계시기 때문 입니다. 즉 새 예루살렘 자체가 성전 입니다. 어제 새벽에 살펴본 것처럼 이 새 예루살렘의 구조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막의 지성소와 구조마져 똑같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2절 말씀을 보면 새 예루살렘에 성전이 없는 이유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천국에서는 하나님을 따로 만나기 위해서 성별 할 공간이 따로 필요 없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구원 받은 백성이 그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한 번 살펴봅시다. 24절을 보면,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갑니다.” 여기서 요한이 ‘만국’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구원 받은 자들 가운데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함께 같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어떤 차별이나 구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모든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갑니다. 특히 이들은 ‘빛’으로 들어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어둠이나 거짓, 불의가 하나도 없는 완전한 사랑과 진리만이 가득한 천국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4절을 우리가 유심히 봐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들어가는 장면 때문 입니다. 본래 요한계시록에서 “땅의 왕”들이란 표현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단의 세력을 따르는 권력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땅의 왕”들은 다릅니다 .이들은 짐승과 바벨론을 대항했던 사람들, 하나님과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르던 충성된 자들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신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되는 교회의 결혼식이라고 말했습니다. 신부가 시집 갈 때 혼수품 가지고 가죠? 유대인들의 풍습도 비슷합니다. 여기서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가는 모습은 마치 신부가 혼수품을 들고 신혼집에 들어가듯이, 구원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릴 예물로 그 분께 드릴 영광과 찬미와 존귀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 이 새 예루살렘의 특징은 성문이 영원히 닫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래 성들은 낮에는 백성들과 멀리서 오고 가는 상인들을 위해서 열어두고, 저녁에는 적들로부터의 보안과 도시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서 닫아 놓습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은 문을 닫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으로 보호하심으로 악한 자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빛나는 영광으로 인해 밤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에는 나와 있진 않지만 요한계시록의 전 문맥들을 살펴보면, 이미 사탄과 그의 세력들은 불과 유황의 못에 던져 졌습니다.
26절은 앞서 24절에서 말씀 드린 혼수품의 이야기와 같이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장면입니다. 이것이 이렇게 반복되어 기록된 것은 그 성에 거하게 될 구원 받은 백성들이 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27절에는 이 성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의 특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속된 것”은 들어가지 못합니다. 여기서 ‘속된 것’이란 말은 헬라어로 해석해 보면 ‘모독적인 것’인데 이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하나님을 모욕한 자들을 의미합니다. ‘가증한 일’은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예수님을 배신한 배교자들 입니다. 이들도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밖에서 이를 갈며 슬피 울 자들 입니다. 이들에게는 더 이상 회개의 기회가 없습니다. 들어가고 싶어도 가지 못합니다. 우리들도 이들처럼 되지 않도록 하나님을 버리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덴을 창조하시고 그곳에서 아담과 하와가 살고 있죠? 이와 대칭되듯이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은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을 창조하시고 그곳에서 성도들이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사는 장면으로 마무리 됩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이 신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인 교회가 함께 살 새 예루살렘의 외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22장은 새 예루살렘의 내부 모습과 그곳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1절을 보면 새 예루살렘에는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가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 집 앞에 멋진 호수가 있고, 강이 흐르면 얼마나 평화롭고 보기 좋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냥 보기 좋으라고 두신 강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물은 하나님의 구원과 생명을 상징합니다. 생명수의 강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와서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 생명을 줍니다. 이 생명수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약속 누구든지 바로 그 생명의 물 입니다. 요한복음 4장 13-14절 입니다. “(요 4: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하나님과 어린양으로부터 나오는 이 생명수는 끊임없이 흘러나와 구원 받은 모든 성도들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합니다.
2절을 보니 새 예루살렘 성에는 생명나무가 큰 길을 따라 강 좌우에 심기어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생명나무는 창세기에서 에덴 동안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먹지 못하고 금지 되었던 바로 그 생명나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구약성경의 에스겔의 환상을 보면 이 생명나무는 각종 실과를 맺는 나무이며 그 잎사귀들은 약 재료가 된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에스겔 47장 12절 입니다. “(겔 47:1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이 생명나무 열매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실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2절 말씀을 보면 이 생명나무의 잎사귀는 만국을 소성시키는 효력이 있습니다. 이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고 모든 상처와 아픔이 치유되는 천국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천국은 다시는 병원 갈 일이 없습니다. 반창고나 연고도 필요 없습니다. 그곳은 고통과 상처가 없습니다. 심지어 저주도 없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새 예루살렘에서 어떤 부족함이나 고통 없이 그리고 어떠한 악의 모습도 없이 거룩한 모습으로 직접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이마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됨을 알리는 표가 있으며, 그로 인해 우리는 영원토록 하나님께 속해 있고,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의 주가 되셔서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클라이막스는 5절 입니다. 다시 밤이 없고 하나님의 영광이 아침 해처럼 밝게 빛나는 그곳에서 우리가 주님과 함께 세세토록, 영원토록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에 대한 우리 모든 성도들의 소망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