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03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 (요한계시록 14장 1-5절)

요한계시록 13장 16절 이하를 보면 사탄이 자기를 예배하는 자들의 오른손과 이마에 표를 주었습니다. 이 표가 바로 ‘666’이었지요. 이 숫자는 하나님께 드려질 예배를 빼앗아가는 모든 적그리스도를, 모든 사탄의 세력을 의미합니다. 사탄은 사람들을 유혹하여 하나님께 돌려져야 할 예배를 훔치고, 사람들의 영혼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핍박과 유혹에도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탄을 예배하지 않고, 오직 어린 양 되신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만을 예배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본문에 등장하는 ‘십사만 사천명’입니다.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14:1)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본문에 사용된 십사만 사천이란 숫자는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신천지가 주정하는 것처럼 구원받은 사람의 수가 정확하게 십사만 사천명이란 뜻이 아니라, 구약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12, 신약의 열두 사도를 상징하는 12를 곱하여 144가 나온 숫자에 히브리 수에서 ‘많다’라는 개념을 가진 수 1000천을 곱한 수 입니다. 12x12x1000 그래서 144,000 이 나온 것이죠. 따라서 십사만 사천은 특정한 사람들의 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니 이 십사만 사천이 어린 양과 함께 시온 산에 서 있습니다. 어린 양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과 그의 백성이 시온산에 서 있는 것이죠. 성경에서 시온산은 예루살렘을 상징합니다. 성경에서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도 부르기도 하고 이스라엘을 야곱이라고 부르기도 하듯이 성경에서는 예루살렘을 시온산이라 부르기도 하고 시온산을 예루살렘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따라서 본문 1절은 예루살렘에 계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백성들 이마에 무엇이 있습니까?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대조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 16절에 사탄이 자신의 백성들의 오른손과 이마에 표를 주었었죠? 사실 이것은 사탄이 하나님을 모방한 것이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백성은 요한계시록 7장에서 이마에 인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장면을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죠. 사탄을 예배한 백성들의 오른손과 이마에 ‘666’이란 사탄을 상징하는 숫자가 적혀 있는데 반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는 그의 오른손과 이마에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쳐 있는 것입니다. 인침을 받았다는 것은 소유권을 상징합니다. 그 누구도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받은 백성들은 하나님께 속한 백성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는 우리야 신앙의 자유가 있으니까 별 감흥 없이 이 글을 읽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1세기를 살아가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황제를 숭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자에게 물어 뜯겨 죽었습니다. 온간 고문과 학대를 받아야 했습니다. 사회에서 버림받고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이런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최종적인 승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 것이죠.
교회의 최종 승리의 모습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면으로 나타납니다. (14: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여기서 많은 목소리는 폭포 소리와 같습니다. 나이아가랴 폭포에 가면 1초에 150만 갤론, 3679톤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 때 나는 소리가 얼마나 큰지요. 트럼펫 7만 6천개를 동시에 힘껏 불 때 나는 소리의 크기와 같습니다. 많은 물소리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우리 하나님의 음성이 마치 거대한 폭소 물소리 같기도 하고 큰 뇌성 같습니다.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14: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구원 받은 십사만 사천 인이 찬양을 부릅니다. 그들이 부르는 찬양을 ‘새 노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는 오래 전부터 불리던 노래죠. 그러나 통일이 되지 않으니까 여전히 이 노래의 제목처럼 ‘통일은 소원’으로 남아 있습니다. 새로울 것이 없는 거죠. 그러나 만일 통일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통일에 대한 환희나 기쁨을 노래하는 새로운 노래들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부르는 찬양과 최후 승리를 얻어 천국에서 부르는 노래는 전혀 다른 찬양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인 예루살렘, 저 천국에 올라가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부를 찬양은 새로운 감격과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입니다. 따라서 이 찬양은 아무나 부르지 못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이 찬양을요, 예수님 모르는 사람이 부를 수는 있겠으나 과연 이 찬양이 말하는 Amazing Grace 를 그가 알까요?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을 결코 배울 수 없는 노래 입니다. 진짜 사랑에 빠져 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사랑 노래를 부르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오직 하나님께 구속함을 받은 백성들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존재합니다. 찬양은 성도의 특권입니다.
이 노래를 부르는 십사만 사천 인에 대한 특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4-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14: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14: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첫째로, 이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우상숭배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우상숭배는 영적 간음입니다. 따라서 정절을 지켰다는 것은 사탄을 숭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숭배한 자들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이들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간 자들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자들입니다. 셋째로,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께 속한 자들입니다. 넷째로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