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12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요한계시록 3장 14~21절)

서울에 사는 한 남성은 대학병원에서 건강검진을 한 결과, 이상이 없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계속 가슴이 답답하고 쉰 목소리가 나 석 달 뒤 다른 병원을 찾아갔더니 폐암 4기로 확인됐습니다. 10년 전부터 검진을 꾸준히 받아온 한 여성도, 깨끗했던 조직 안이 불과 2년 만에 커다란 암 덩어리로 채워졌습니다. 한 30대 남성은 건강검진에선 정상이었는데 넉 달 뒤 대장암 3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한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병원 오진으로 인한 피해 사례들 입니다.
병원 오진 중 가장 흔한 사례는 암이 생겼는데 못 찾아낸 경우입니다. 대한민국의 의료기술은 최첨단으로 앞서갑니다. 그러나 한국소비자원이 2012년부터 2015년 2월까지 ‘질병 오진으로 인한 피해’를 분석한 결과 3년의 기간 동안 모두 480건이 접수 되었는데 그 중 무려 62%가 암을 오진하였습니다. 잘못된 진단, 즉 오진은 환자를 죽음으로 내몰게 됩니다. 실제로 작년에는 오진으로 인해 골드타임을 놓친 환자가 그의 팔과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잘못된 진단은 이처럼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과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영적 상태를 잘못 진단하는 사람은 끝을 모르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셈 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잘못된 자기 진단이었습니다.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라오디게아교회 성도들은 스스로를 부자라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부자’라는 말은 단순히 소유가 많다는 의미가 아니라,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우리 교회는 신앙생활 잘하고 있어서 하나님 보시기에 분명 좋은 교회다.’ 하고 스스로를 진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잘못된 자기만족입니다. 우리 들은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모습 일까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보며 “그래도 나는 좋은 신자지.”하고 말한다면 과연 그러한 근거는 어디서 나올까요? 만약 예수님께서 오늘 내 삶의 모습을 보신다면 어떻게 평가하실까요? 정확한 진단은 환자 스스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의사가 내려줄 때 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시각이 아닌 예수님의 눈으로 우리의 삶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라오디게아라는 도시는 금으로 유명한 도시었습니다. 도시에는 부유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진으로 인해 도시가 파괴 되었을 때, 다른 도시들은 황제의 도움을 받았지만, 자존심이 센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황제의 원조를 거부했습니다. 자부심이 센 것은 도시 뿐만 아니라 이 도시 안에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역시 그들의 부함을 자랑했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부족한 게 없습니다. 교회 재정도 충분하고, 성도들도 부한 도시에서 부유하게 살아갑니다. 그들은 이런 외적인 풍요로움이야말로 자신들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증거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이들의 이런 자기 진단을 비판하십니다. “너희는 부자가 아니다. 너희는 부요하지 않다. 너희는 부족한 것이 많다. 너희는 오히려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다.” 왜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우리는 그 근거를 17절의 전 문맥인 15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은 열정이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끼리도 충분히 좋잖아. 전도할 필요 없어. 우리 정도 신앙생활하고 있으면 잘 하는 거 아닌가? 주일 예배 안 빠지고 헌금 꼬박꼬박 내잖아. 이 정도면 좋은 크리스찬 아닌가?”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의 가장 큰 실수는 현상유지에 만족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린아이가 자라지 않고 키가 그대로다. 그러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성장하지 않고 현상유지를 한다면 이미 그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반드시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꼭 수적인 성장은 아닙니다. 교회의 내실이 채워지고, 말씀이 흥왕케 되고, 매번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새로운 은혜와 감격이 있는 예배가 드려지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전도와 선교에 힘쓰는 교회가 바로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야 교회에는 이러한 열정이 없었습니다. “이 정도하면, 이 만큼하면 괜찮은 거지. 여기서 더 하면 오바야. 피곤해. 돈 없어. 시간 없어. 이만큼만 해도 천국 가잖아? 구원이 뭐 열심히 일해서 받는건가? 고상하게 신앙생활 해도 되잖아.” 특별히 신앙생활 오래하신 분들 가운데 이러한 미지근한 신앙이 있을 때가 많아요. 교회 10년 20년 다녀도 그냥 맨날 하는데 까지만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신앙생활 오래해도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는 늘 평행선입니다. 절대 더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도 사모함도 없습니다. 그냥 현상유지에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15절에 말씀하십니다. “너가 차든지 더웁든지 해라!” 우리가 스타벅스에 커피를 사러 가도 Hot or Cold 둘 중 하나입니다. 미지근한 커피는 메뉴에 없습니다. 왜요? 다 식어버린 미지근한 커피를 누가 돈 주고 사려고 하겠습니까?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려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겨야지. 마실 나온 것처럼 교회 와서 잠깐 앉았다가 가는 것은 하나님 보실 때 가장 악한 사람들입니다. 영국의 스펄전 목사님은 “만약 교회에 이런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5천명의 성도가 있다면 그들은 5천 개의 방해물이 될 것이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열심 있는 열두 명의 성도만 있다면 “광야 사막과 같은 곳도 기쁨의 복음이 넘치는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열두 명보다는 나머지 5천명에 더 가깝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강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16절 말씀입니다. (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사람을 주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토하여 내칩니다. 언제 입 안의 음식을 토해냅니까? 매스껍고 역겨울 때 그러합니다. 우리가 떫은 감을 한 입 베어 물었거나, 날짜가 한참 지난 상한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고 생각해 보세요. 당장 뱉어버리지 않겠습니까? 즉 대충 하나님 믿는 사람들, 한 발은 세상에 두고 한 발은 교회에 두고, 뭐 이 정도 하나님 믿으면 되지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보실 때 상한 우유처럼 매스껍고 역겨운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님이 토해내실 것이라 강하게 경고하십니다. “예수님 좀 심하신 거 아닌가? 그 착하고 온유하신 분이 이렇게까지 표현하실 필요가 있는가?” 하고 생각하신다면 착각입니다. 어느 의사가 수술을 거부하는 암 말기환자에게 빙그레 웃으며 “선생님 수술 하시죠.” 하고 부드럽게 말하겠습니까? “선생님 지금 당장 수술 안 하면 죽습니다!” 하고 강하게 말하지 않겠어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토해낸다는 말씀은 사안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혹시 지금 내 신앙생활에 만족해하며 살아가시는 분이 계십니까? “나 정도 되면 괜찮은 그리스도인이지..” 하고 스스로를 부자로 생각하시는 분 계십니까? 지금 내 영혼이 예수님의 입 안에 있는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해 늘 가난한 심령, 갈급한 마음을 가지세요. “하나님, 더 큰 은혜를 주세요. 더 큰 은혜를 사모하게 해주세요.”하고 구하세요. 마음이 식어 있는 분들은 “하나님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식지 않는 뜨거운 열정을 주세요!”하고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배고픈 자 만이 주님의 식탁에 나아갈 것입니다. 목마른 자만이 생수를 마시려 나아갈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늘 베고프시기 바랍니다. 늘 목마르시기 바랍니다. 늘 하나님을 향해 가난한 마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바른 진단을 하지 않으면 환자의 목숨이 위태로워집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진단을 바로 하지 않으면 영적 생명이 식어가게 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부자라 생각했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없는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벌거벗었으며, 눈이 어두운 교회였습니다. “이 정도면 괜찮은 그리스도인이지”하는 그들의 미지근한 태도야말로 예수님이 가장 역겨워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혹시 우리들에게도 이런 모습은 없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어제보다 오늘 주님을 더 사모하게 하옵소서. 오늘보다 내일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하옵소서. 이런 꺼지지 않는 사랑과 열정으로 주님을 향해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