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우리는 전도서를 살펴볼 것입니다. 전도서의 저자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 왕입니다. 솔로몬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한 평생 살면서 부귀와 영화를 모두 누려본 사람입니다. 그가 얼마나 화려한 삶을 살았던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28-29절에 말씀 하시기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옷을 세상적인 아름다움과 풍족함을 모두 누린 사람이 바로 솔로몬 입니다. 일년 수입이 금만 따져도 20톤 입니다. (오늘 금 시세로 따지면 금만 한 해에 944M 달라 정도 들어오는 것이다.) 그가 소유한 외양간만 4천개 입니다. 솔로몬과 그의 가솔들이 하루에 소비하는 식사량을 보면 밀가루 19,800리터 (오늘날 우리가 먹는 빵 14,000인분 입니다.) 소가 30마리, 양 100 마리 등등 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다스렸습니다. 그는 먹을 것과 재산만 풍부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도 풍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지은 잠언의 숫자만 약 3천개, 지은 노래만 1005개가 됩니다. 그리고 식물학 박사라 할 수 있을 만큼 나무에서부터 빈들에 핀 꽃과 풀 이름까지 알 정도로 똑똑 했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 즈음 꿈꿔봤을 만한 부귀영화가 넘치는 인생, 그 이상을 살아간 사람이 바로 솔로몬 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솔로몬처럼 되지 못해서 안달 입니다. 밤낮 돈돈돈하며 쉬지 안고 일합니다. 마치 솔로몬처럼 되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하며 삽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이들이 그토록 부러워하던 인생을 살아간 지혜자 솔로몬은 전도서에 모두를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전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에서 계속해서 반본적으로 등장하는 이 ‘헛되다’ 의 히브리어 원어 ‘헤벨’이란 단어에는 ‘공기’,’ 호흡’, ‘공허함’, ‘불만족’ 이란 뜻이 있습니다. 공기를 손에 잡으려 해보십시오. 아무리 하루 종일 땀 흘리고 노력해봐도 아무런 소득이 없습니다. 또한 숨을 한 번 크게 ‘후’하고 내쉬어 보십시오. 숨은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이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고 아무런 유익도 없는 것이 바로 본문에서 말하는 ‘헛됨’이라는 단어의 뜻 입니다.
천하만민이 동경한 솔로몬, 그러나 그는 이 세상이 결국 헛된 것으로 가득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는 전도서 곳곳에 ‘헛되다’란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합니다. 즐거움이 헛되고, 지혜가 헛되고, 수고가 헛되고, 기한이 헛되고, 재산이 헛되다고 합니다. 결국 전도서는 허무로 가득한 인간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도서 마지막 장에 가서야 비로소 그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헛되지 않은 단 한 가지를 이야기해 줍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전도서의 전체적인 바로 이 하나의 주제를 향하고 있음을 염두 해 두시고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솔로몬이 헛되다고 하는 말은 염세주의적인 태도로 이 세상은 허무와 절망 뿐이니 살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이 세상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사실 영원하지 않고, 사라질 것들이라 그 가치가 영원할 수 없다고 말해주는 것이며, 동시에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는 지혜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전 1:3)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솔로몬은 인생의 허무를 논하며 인간이 ‘태양 아래’하는 모든 수고가 사실은 헛된 것 즉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고 언급합니다. 특별히 여기서 솔로몬이 ‘해 아래서’라는 표현을 쓴 것을 주목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은 하늘에 거하시고 사람은 땅에서 살아간다는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해 아래서’라는 표현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행해지는 모든 인간의 활동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해 아래서의 삶은 그저 짧은 순간 있다가 사라지는 허망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인생의 허무함을 그려냄으로써 허무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인생의 참된 가치는 바로 해 위에 계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주어진다는 것을 강력하게 암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전 1: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 같이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결국 이 세상을 떠나가고 다음 세대에 자신이 살던 무대를 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불과 50년 혹 100년도 채 안되는 시간이 흐르면, 기억 속 잊혀진 오래된 배우처럼 시간이 흐르면 그가 이 지구 위에서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 역시 솔로몬이 이 세상에서 짧게 살고 죽을 인생의 허무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들의 삶이 어찌나 짧은지 솔로몬은 5절에 해가 아침에 떴다가 밤에 다시 지는 것으로 비유합니다. 하루가 얼마나 짧습니까? 솔로몬은 우리 인생도 그처럼 짧다고 이야기 합니다.
게다가 그 안에서 하는 일이 얼마나 허무한지 마치 바람이 오늘은 북쪽에서 남으로 불다가 다음에는 다시 북으로 부는 것과 같고, 모든 물이 바다로 흐르지만 결국에는 또 다시 증발되어 하늘로 올라가 비가 되어 땅에 내려 바다를 채우지 못하는 것과 같이 허무하다고 표현 했습니다.
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전 1: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어느 한 사람이 자신이 마치 특별한 일을 하는 것처럼 느끼고 “난 새로운 시대를 열었어! 난 역사 속에서 기억 될꺼야! 내가 하는 일은 특별해!”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볼 때 이 사람은 결국 역사 속으로 잊혀질 것이며, 그가 한 일이란 것은 그 당시에는 새로워 보여도 무구한 역사 속에서는 마치 “구석기 시대에 누가 처음 돌을 들고 도구로 사용했는가?”하는 질문처럼 아무도 그 사람을 특별한 사람처럼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죠. 물론 어떻게 보면 인간의 역사를 보면 없던 자동차, 비행기, 컴퓨터, 우주선 등 눈부신 발전으로 새로운 것이 나타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러한 것 역시 결국에는 이 세상에서 유한한 인간의 허무함을 극복할 수 없는 헛된 것에 불과한 것이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마지막 11절에 솔로몬은 이전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을 다음 세대가 기억하지 못하리라고 말합니다. “(전 1:11)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몇 십년 짧은 기간 동안 생명을 유지하다가 죽게 될 미약한 존재라는 것이죠. 아무리 그가 살아 있을 때에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인 것처럼 보이고, 큰 업적을 성취한 위인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잊혀질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솔로몬은 우리의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을 다양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듯이 그가 이와 같이 인생의 허무함을 강조하는 것은 염세주의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어차피 죽을 것이고 사라질 것이니 열심히 살 의미가 없다. 마셔라 부어라! 오늘을 즐기자!” 이런 쾌락주의도 아닙니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없이 사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허무하고 헛된 것인지를 강조함으로써 우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솔로몬은 인간이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수고가 헛되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즉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생은 손으로 바람을 잡으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혹시 우리들도 손으로 더 많은 바람을 잡으려고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세상의 허무와 절망을 극복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진리이시며 영원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붙들고 사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것만이 참으로 가치 있는 일 입니다. 우리의 남은 인생, 땅의 것과 헛된 이 세상을 위해서 살아가지 마시고 영원한 것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위해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